전쟁도 멈추지 못한 자유자의 '순복의 걸음'

[ 선교여성과 교회 ] 김순호 선교사 이야기 16

정안덕 박사
2022년 11월 23일(수) 10:57
장신대 김순호기념여학생관 하늘기도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신께 부여받은 내재적인 혜택 중에 선악을 제 맘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일찍이 중국에서는 그것을 '심권'이라 본 이도 있었고, '성본선'이란 말로 본성적 자유의 온전함을 설명한 이도 있었다.

애초에 우리 각 사람을, 아예 찬 얼음이나 항상 뜨거운 불같이, 그렇게 다 선(善)으로 고정시켜 버렸으면, 사람이 신경도 안쓰고 참 편했을 텐데… 하며, 그 자유를 오히려 불합리하거나 불리한 것으로 간주해, 실패작 인간을 만들어 낸 자를 형편없는 '졸장' 정도로 크게 폄하하는 이들도 중국에는 옛부터 있었다.

하지만 꼭 그리 생각할 것만은 아니다. 물론 그 '자유'가 방종이 되어, 언제든지 그리고 압도적으로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종'이 되게 할 충분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 이 세상 속에서 선을 택해 산다는 것이 극도로 어렵고,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때로는 스스로 자초함으로 '자유로이', 심신을 믿음에 드려 '조물주의 온전하고도 영원하신 성품에 참예'하는 자리에 이르게 함으로, 인간을 지으신 참 뜻을 인식하고 삶의 참된 가치를 찾아 누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앙 자유'에 대한 추구도 그 속에 내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보이지도 않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으면, 우리나라 6.25 전쟁 전후, 북녘땅의 그리 무수한 이들이, 그것을 보장받고자 평생에 이룬 모든 것, 가진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정든 고향 산천, 부모 형제를 두고, '털리고 또 털려도 남으로' 그리고 또 남으로 내려옴을 주저치 않았던가?

이 글을 적어가며, 김순호가 스스로 깨뜨려 마치 '허비해 버리듯' 그리스도께 바친, 자신의 '옥합' 속에 담은 '향유' 속에 어쩌면 그 '자유'의 성분이 함유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찌 보면, 당시 참으로 쉽지 않은 신(新) 학문을 접한 엘리트 여성이 '독신의 길'을 택함으로, 정상적이고도 원만한 가정을 가질 보장을 통채로 저버리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장로 가정의 유복한 조선인 규수가 왜 그리도 '정처 없는' 선교사의 길로 투신하였을까?

그리하여 안신입명의 꿈까지 다 내던지고, 십수 년 '수토불복'의 이방 땅에서 그것도, 온갖 의심과 불신, 배척의 그 땅에서, 그이들 자신이 근본 '원치도 않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보겠다고 그 갖은 고생을 다하지 않았던가?

어디 그뿐이랴? 닥쳐오는 신앙 자유의 박탈을 눈앞에 보면서, 불같은 핍박과 짓누르는 압박을 받아야만 하는 절대절명의 시각이 닥쳐오자, 그 큰 강 같은 대세의 물결을 거스려 오히려 단독으로 북상하고 말았다! 수많은 다른 이들 같이 너끈히 면할 수도 있었던 목숨의 위험을, 그리 자초하고 만 것이다. 그녀가 자유하였으나 자기의 마땅한 '권'을 도무지 쓰지 않고, 불 보듯 위태로운 그 길을 오히려 택한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번에 김순호 선교사님의 족적을 한걸음 한걸음 따라가 보면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가 최후의 그 기간 중 '남하'의 대세를 거스려 단독 북상했다고 하는 사실과는 정반대의 신념을 선교 사역 기간 내내 묵묵히 실천해왔다는 것이다. 사실 그녀는, '순복'의 종이었다!

3.1 만세 운동으로 붙들려, 일제에 의해 몸도 맘도 씻어낼 수 없는 고난의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선교사로 온몸과 여생을 드리겠다고 굳게 맘먹었던 어린 소녀 김순호는 주께 작은 '맘' 드린 후에, 아울러 자신의 '삶'을 차근차근 순종하여 드렸다. 당시 일개 조선 여성으로서는 희소하고도 난득한 그 긴 수련의 모든 과정을 감내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서른 살 적지 않은 나이에 그 낯선 땅에 들어가서 말씀으로 한족 여성을 섬길 일념으로, 생소한 말을 습득하려고 아낌없이 바쳤던 그 소중한 긴 수련의 시간이 그랬다. 이역땅 중국에서 독신 조선 여성으로서 그 모든 불편함과 불리함과 불안함을 견디며, 일생의 염원대로 선교의 직접적인 사역에 돌입하기까지, 불같은 열정을 꾹꾹 누르고 견딘 인내는 과연 얼마였던가! 그러기 위해 남몰래 쏟은 눈물의 기도와 장기간의 남모를 고생은 또 얼마였을까?

그러나 그녀는 '맡기운 이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버리고' 주위와 늘 기쁨으로 협력하여 조화롭게 자신에게 배당된 선교의 부르심을 감당했다. 절차에 의거해 천거받았고, 파송받았으며, 지도받았고, 감당하였다. 정해진 안식의 시간을 마쳤으나 뜻밖에도 대기하라고 한다. 그래서 기다렸고, 천신만고 임지에 다시 들어가 간신히 사명을 계속 감당하게 된 기쁨도 잠시, 돌연 철수하라고 하여 또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제는 선교가 그만 종결되었다 하니 사임까지 하게 된다. 선교사가 '직'을 사임하는 일, 어쩌면 본인이 가장 원치 않는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어떤 난관도, 불합리도 심지어 전쟁이라도 그 '순복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그의 선교적 생평을 통틀어, 그가 유일하게 취한 '튀어 나간' 자유 행동은 어쩌면, 1942년 9월부터 본국에서 선교비가 끊어지게 됨으로 그 후 수년간 만주에서 단독으로 감당한 '독립적 사역'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그 삶의 최후 결정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었다. 그리고 큰 바다의 밀물같이 휩쓸려야 했던 그 불가항력적인 시대적 대세와 주님의 섭리 사이에서 고민했던 김순호 선교사님 일생 최후의 향방은 다름 아닌, 북의 끝 '신의주 북행'이었으니! 그럼으로써 그는, '아골 골짝' 그곳과 '소돔 같은 거리'를 복음과 사랑 안고 찾아갈 수 있었다.

정안덕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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