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

[ 인문학산책 ] <완>

최신한 명예교수
2022년 11월 10일(목) 08:49
나이듦은 인문학의 새로운 화두가 되었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노년의 건강과 마음의 안녕에 큰 관심을 가진다. 늙어감은 생애 단계의 특징을 확인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생애를 청년 장년 노년으로 나눌 때 청년과 노년은 확연히 대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청년은 열정적이며 두려움이 적고 희망과 용맹이 넘쳐난다. 돈이나 실리보다 명예와 승리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이에 비해 노년은 열정이 약하고 두려움이 많은 대신 매사에 심사숙고하고 돈에 대한 욕심이 많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나오는 생애 규정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청년과 노년의 부족함과 넘침이 조화를 이루는 시기는 생의 최고점으로 불리는 장년이다. 장년기에 많은 일을 시도하는 것은 성공적인 삶을 보장한다.

일에 소극적임, 육체적으로 쇠약함, 욕구의 감퇴, 죽음을 앞두고 있음 등으로 노인을 비판하는 세평에 맞서서 키케로는 나이듦을 옹호한다. 노인도 정신의 훈련으로 자신을 지배할 수 있다. 젊음과 늙음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육체의 나이가 아니라 정신의 활동성이라는 것이다. '노인의 한탄은 육체의 늙음에 대한 한탄이 아니라 이 늙음 속에 정신의 젊음이 없는 것에 대한 한탄이다. 청년의 한탄은 육체의 젊음 속에 정신적 성숙이 없는 것에 대한 한탄이다.'(슐라이어마허) 활동성이 줄어들고 점점 연약해지는 노인은 화려했던 과거에 매달리는 반면 왕성한 활동과 정열적인 삶을 추구하는 청년은 미래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있다.

노인은 아직 젊다는 생각과 늙어가는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아름다웠던 옛 시절로부터 점점 소외되어 간다고 느낀다. 육체의 쇠퇴를 느끼면서 시간의 상실을 의식하는 노인은 화려했던 과거에 대한 회상과 추억에 매달린다. 과거를 현재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현재의 삶이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노년은 육체의 쇠약과 죽음의 공포에서 존재론적 소외를 느끼며, 노년을 대하는 사람들의 눈초리에서 그때마다 사회적 소외를 느낀다. 스마트폰 앱이나 무인 주문 시스템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서 문화적 소외를 느끼기도 한다. 노년의 제1 특징은 소외이다.

노년에게는 이런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 면이 있는데 그것은 오랜 경험과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와 성숙이다. 그는 삶의 경험에서 축적된 지혜와 숙의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노년은 육체의 민첩함으로 일하지 않고 예견과 권위와 결단성으로 일한다. 이것은 청년에게는 부족한 성찰과 추론과 판단 능력에서 나온다. 기억력과 건강의 문제는 인생의 어느 시기에도 발생할 수 있으므로 노년의 결정적 약점은 아니다. 지혜를 잘 발휘하는 노년은 존경받을 뿐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까지 발휘할 수 있다. 노년의 제2 특징은 성숙이다.

성숙한 노년은 자유롭다. 기계의 부품 같았던 생업의 마당에서 해방되어 그동안 원했으나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면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육체적 물질적 욕구에서 해방되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선물이다. 노년의 지혜는 죽음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위로해 주며 죽음 이후의 삶까지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삶의 성숙은 인간성의 면류관이다. 과거에 집착할 때 소외를 느끼지만 미래를 완성하려고 하면 삶은 더욱 성숙해진다. 소외와 성숙의 교차가 일어나는 시점은 현재이다. 지혜로운 노년의 현재는 즐겁고 자유로운 시간이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의 평정을 얻는 때이다. 전도서의 저자는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고 말한다. 초연한 내맡김으로 생을 즐겁게 누리는 것은 노년의 축복이다.

은퇴가 미담으로 알려지는 경우는 모두를 훈훈하게 한다. 퇴직금에 자신의 예금을 보태어 장학금을 기부했다는 뉴스나, 후임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공동체와 거리를 두겠다는 기고는 은퇴자의 빛나는 지혜와 자유를 보여준다. 그러나 후임자에게 간섭하는 은퇴자의 일그러진 모습도 실재한다. 그는 지혜의 소유자가 아니라 소외감을 이기지 못하는 존재이다. 간섭은 세속적 욕망의 발로일 뿐이며 지혜가 아니다. 원로제도는 은퇴자의 지혜가 공동체의 발전과 성숙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을 뿐 지혜 없는 노년까지 섬기라는 명령은 아니다. 오래전에 회자 되었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처럼 '원로가 없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충분히 가능하다. 교회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은퇴 연령의 조정과 함께 수많은 직업군 가운데 종교인만이 원로제도를 고수해야 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노년기에는 죽음의 불안 때문에 사고의 폭이 좁아지고 자기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게 되므로 남의 입장에 서기가 어려워진다. 몽테뉴는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를 미리 생각하는 것이며, 죽는 법을 아는 것은 우리를 욕망의 속박에서 해방한다고 한다. 신앙을 가진 노년에게서 사심 없는 이타성과 묵묵히 선을 행하는 합리적 바보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최신한 명예교수 / 한남대학교

※ 이번 회를 끝으로 '인문학산책' 연재를 마칩니다. 그 동안 이 코너를 통해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신 필자 여러분과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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