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 선교여성과 교회 ] 김순호 선교사 이야기 ⑭

정안덕 박사
2022년 11월 08일(화) 05:14
'순교자 추모예배'순서지. (사)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제공
감격 속에 해방을 맞이한 한반도는, 꿈에도 상상 못한 민족의 대립과 동족 상잔의 국면으로 전화되어 급히 치닫고 있었다. 국토 한가운데가 38선으로 가로막혔고,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전 지역이 북측에 점령되자, 각 처의 교회와 신학교의 문은 닫혔다. 점층되는 핍박으로 성도들은 무차별 구금되었다. 그럼으로써 무수한 양민뿐 아니라, 허다한 신자와 특별히 목회자들 그리고 신학생 대다수가 난을 피해 무작정 남으로 남으로, 왕래가 더 이상 금지된 38선을 넘어 탈출하여, 서로들 갈라지고 흩어지는 실로 인간 비극의 형국이었다.

"아무래도 죽을 것,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도하다 죽어야지. 나는 북쪽으로 올라갈 거야."

그러한 김순호의 결단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비록 원수가 되었던 내 민족, 사랑하였기에", 그녀는 북녘땅에 끝까지 남았다. 결국 신학교 문도 폐쇄되었다. 때마침 신의주제2교회가 김순호를 청빙하였으니, 그에 부응하여 그 발걸음은 조선의 '땅끝' 신의주를 향한다.

그렇게 수년이 지난, 1951년 정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전세가 돌변하여 국군과 연합군이 남북한 전역을 탈환할 즈음, 반도 최 북방 접경 도시 신의주는 퇴각하던 인민군이 교인들을 무차별 나포하거나 처형하는 극히 위태로운 국면에 처한다. 당시, 신의주제2교회는 새벽기도 중이었고, 김순호는 교회당 안에서 폭도들에 의해 끌려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김순호의 시신은, 국군이 신의주까지 올라가 진격할 때 마침 함께 했던 이권찬이 확인하였다고 전해진다. 훗날 총회 전도부 총무를 역임한 그의 증언을 통해 김순호의 순교는 한국 교회에 의해 보편적으로 인식되었다. 매년 4월 초면 공덕귀, 박용길 여사의 주동으로 시작된 '순교 여교역자 추모예배' 그리스도의 수난주간을 앞두고, 그 다섯 분 여성들의 '거룩한 수난'을 함께 기억하자는 취지였다. 그 예배를 통해, 김순호는 그중 한 분으로 추모되어왔다. 내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수 차례 그 예배에 참석했을 때 본 벽에 나란히 걸린 다섯 분 여성의 유난히 큰 초상들이 퍽 인상적이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이 작은 글을 적어가면서, 마음판에 시종 새겨지는 말씀이었다. 김순호의 마흔아홉 짧은 일생, 바로 그 하나의 '밀알'이 아니었을까? 그러기 위해 그가 간 길은 무엇이었을까?

김순호를 겪어 본 이들 속에 깊이 각인된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 정도는 가히 초인적이었다. 오랜 시간 그녀와 함께 생활해 왔던 조카 김병숙에 의하면, 김순호는 매일 새벽 3시에 교회에 나가, 3시간 이상을 기도에 쏟았다고 하니, 그의 복숭아뼈는 점점 굳은살이 배겨 낙타 혹 같이 되어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가 주님을 의지하였고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을까? 평양신학교 새벽기도회에는 제일 먼저 나가 제일 나중에 나오는 이가 바로 김순호 선생이었다고 그의 제자 이연옥은 회고한다. 새벽기도가 끝나고 여학생 기숙사에 돌아오면, 사감 김순호는 방마다 찾아다니며 만면에 기쁨을 머금고, 숙사생들과 일일이 아침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의 선교 사역의 시작은 재령 장수산 철야기도였고, 삶의 매듭은 신의주 새벽기도였다.

그 기도의 중심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김순호가 겪어 온 삶의 맥을 짚어 볼 때, 그 강조점은, 자신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요구나 갈망에 치중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아 그 '부르심'에 합당한지 통찰함으로 자복하고 통회하는 '회개'에 더욱 있었지 않나 싶다.

정안덕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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