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다 죽어야지…"

[ 선교여성과 교회 ] 김순호 선교사 이야기 ⑫

정안덕 박사
2022년 10월 26일(수) 14:55
청도교회 일부 교우들. 좌측부터 부흥사 홍대위 목사, 청도교회 설립자 김윤식 의사, 박상순과 김순호 두 선교사가 보인다. 김순호가 청도에 머물던 때가 1938년 10월에서 1939년 9월이니, 복장으로 보아 그해 겨울이었을 것이다(자른 그림, '중국 선교를 회고하며', 254-255).
해방과 거의 동시 실시된 38선 이북에 대한 소련의 신탁 통치 이후, 북측 군대가 평양에 입성하면서 교회에 대한 핍박은 표면에 부상하였고, 박해는 점층적으로 노골화되었다. 신학교 강의는 중단되었고, 밖의 세상은 시초를 다투는 풍전등화의 형국이었다. 1948년경, 평양신학교 여자 기숙사에 머물던 여학생 이연옥, 조순덕과 조카 김병숙이 모여, 남쪽으로 탈출을 결의한 뒤, 김순호를 찾아 간다.

"선생님, 우리 몇 사람은 서울로 피난 나가기로 결정했는데, 선생님을 꼭 모시고 가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이제는 떠나야겠습니다. 함께 내려가십시다.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의외였다. 오히려 빙그레 웃으며 말씀한다. "나는 갈 수 없어."

"예 …? 아니 왜요? 선생님께 딸린 식구가 있어요? 가진 재산이 있나요? 도대체 왜 못 가신다는 말씀이세요? 함께 내려가서 더 큰 일을 도모해야지요!"

애타게 간청하는 제자들을 향해 김순호는 단호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속마음을 나눈다. "38선 넘어가다 들키면, 둘러대야 된다메? 그리 못해. 어차피 죽을 것 …,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도하다 죽어야겠지."

넘어가다 보면, 십중팔구 검문을 당하게 될 것이고, "어디 가냐?"라고 물으면, 적당히 둘러대야만 하고, 그렇다고 이남으로 간다고 하면, 그대로 붙잡히게 될 것이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결국은 없는 말을 지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거절이 단순히 거짓말을 안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개인적인 '자기 의'의 발로일 뿐이었을까?

조카 김병숙에게는 따로, "나는 아무래도 전도하다 죽으러 올라가야겠다. 너는 내려가거라"라고 속마음을 전했다고 하니, 그 한마디 말씀 속에는 북녘에 남은 그 '한 마리의 양'을 구하고자 함에는 자기 목숨이라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겠다는 선교사님의 더욱 간절한 진심이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김순호와 제자들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스승의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 견딜 수 없었지만, 결국 눈물의 기도로 헤어졌다.

김순호는 그 말대로 정말 내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얼마 동안 평양신학교에 그대로 머물다가, 목자가 절실히 필요했던 북녘의 '남은' 양떼들을 돌볼 맘으로, 새 임지인 신의주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그 후로는, 이북에서 또다시 남하한 사람을 볼 수 없었으니, 김순호의 소식은 거기서 끊어진다.

당시 김순호의 그러한 삶을 통해 감화된 제자들 중, 신앙의 자유를 갈망해 월남한 이들은 대부분 20대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남하 후, 그들은 스승의 발자취를 기꺼이 좇았다. 김순호의 영향으로 '속죄의 확신'을 갖게 된 제자들은 각자 그 '목자'의 본을 따라 신실한 여종이요, 전도부인과 전도사로서, 그리고 교육자요 여성 지도자로서 한국 교회에 크게 이바지하며 주어진 한 세대를 온 힘 다해 감당했다.

김순호, 그는 위험과 시련이 일신에 닥쳤을 때, 광야에 내던져진 양떼를 돌보고자 스스로 찾아 올라간 '목자'였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복'을 누렸다. 물살을 헤치고 흐름을 거스렸고, 폭포수라도 기꺼이 튀어 올랐다. 긁힌 피 상처 마다않고 끝끝내 생지에 도달하여, 새 생명을 얻고자 기어이 죽고 마는 한 마리 '연어' 같이….

정안덕 박사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