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선인가, 악인가?- 악과 고난에 대한 변증적 해명(3)

[ 알기쉽게풀어쓴교리 ] 30. 기독교신론(8)

김도훈 교수
2022년 10월 27일(목) 06:31
현대의 신무신론자들은 종교인들이 더 도덕적이라거나 절대적 도덕은 하나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주장들을 극히 싫어한다. 모든 것이 우연의 소산, 혹은 진화의 산물일 뿐이다. 선악의 구별이나 이타적 행동도 그들에게는 유전자의 행동일 뿐이다. 그런 행동을 유도하는 유전자 속의 정보조차도 우연일 뿐이다. 하나님이 심어준 양심이나 도덕법이 존재한다는 것에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도덕의 뿌리는 단지 우연이라는 것이다. 무신론 철학자 러셀은 "사람의 기원, 사람의 성장, 사람의 소망과 두려움, 사람의 사랑과 신념은 원자들의 우연한 배열의 소산일 뿐"(그로타이스, 528)이라고 주장했고, 마이클 루스도 "도덕성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도움일 뿐이고 생존과 번식을 위한 도움 너머 혹은 이것 외부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그로타이스 530)고 주장했다.

심지어 도킨스 같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선과 악 혹은 도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도킨스에 의하면 "우리가 관찰하는 우주는 그 바탕에 설계도 없고, 목적도 없고, 악도 없고, 선도 없을 경우 우리가 기대해야 할 바로 그 속성을 갖고 있다. 맹목적이고, 무자비하고, 냉담함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DNA는 단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맞추어 춤을 춘다" (레녹스, 194)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는 도덕적인 문제에 그리도 할 말이 많은지 모르겠다. 선악이 없다면서. 오로지 DNA뿐이라는 유전자 운명론(그에게는 유전자가 신이다)만을 주장하면서 말이다. 레녹스는 도킨스가 주장하는 "맹목적인 물리적인 힘들과 유전적 복제라는 결정론적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한다. 전쟁과 대량학살과 자살 폭탄 공격 등 세상의 모든 악이 유전자에 맞춰 춘 춤이며, 악행을 행한 자들의 행동이 다만 유전자의 지시에 따른 행동이었다고 상상해보라. 누가 그들에게 비도덕적이라고, 사악하다고 비난의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의 '만들어진 신'은 서두부터 끝날 때까지 도덕적인 물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모순이고 아이러니다.

또 하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만일 악이나 고난이 선한 열매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악일까, 선일까. 간단히 물어보자. 고난이 악인가, 선인가? 답하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해럴드 쾨닉(Harold G. Koenig)은 '영성과 고통'이라는 글에서 고통을 육체적 고통, 정서적 고통, 영적 고통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의미요법과 실존분석 협회'의 설립자인 랭글(Alfried Langle)은 고난을 육체적 고난, 심리적 고난, 자기소외의 고난, 실존적 고난으로 분류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모든 아픔이 아픔이고 고통이다. 이들의 분류를 주목해보면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을 망라해 놓은 것 같다. 어느 하나도 선하거나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듯하다. 그래서 쾨닉은 고통은 파괴적이며 고립적인 것이라고 진술한다. 자신을 파괴하고 가족을 파괴하며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그것은 절망을 생산하며, 사람들로 분노하게 만든다. 삶을 짐스럽게 하며 감사를 상실케 한다. 정서와 영혼을 침체하게 하며 희망의 상실을 초래하고 결국 자살에 이르게도 한다.

그러나 쾨닉의 말대로, 고통과 고난이 반드시 부정적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인 유익도 제공한다. 고통 중에 있지 아니한 사람이 가질 수 없는, 타인의 아픔과 고난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영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하나님을 발견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좀 더 친밀한 관계를 유발하기도 한다. 긍정심리학자들인 호프만(E. Hoffman)과 컴튼(W. Comton)도 유사한 관점을 제시한다. 고난은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내고, 고난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재평가하여 변화된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난은 자신감을 고양시키기도 하며 인간관계를 강화시키는 기회가 되고 삶의 철학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또한 대부분의 종교가 인정하듯 고난은 영적 성숙의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인간의 잘못을 치유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오는 고통도 있다. 그러니 한 번 돌이켜보고 질문해 보라. 인생에서 무엇이 자신을 성숙하게 하고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게 했는지. 기쁨과 행복인지, 아니면 고난이나 고통인지. 고난과 죽음 앞에서 최소한 한 번쯤은 죽음과 인생과 신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을까. 그래서 필립 얀시는 "고통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다시 한 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고난은 선인가, 악인가?

마지막으로 몰트만의 말을 인용하고 마치고자 한다. "삶은 고난과 고통과 모순을 추방해 버림으로써 특별히 인간적인 삶으로 되지 않는다. 삶은 고난과 고통과 갈등과 모순이 없는 세계 속에서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세계는 오히려 경직과 죽음의, 생명 없는 세계일 것이다. 고난을 당하지 않고는 기쁨을 느낄 수 없다. 기쁨에의 능력은 고통에의 능력과 같은 것이다 …. 고통을 당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크면 클수록 그의 행복의 경험도 커진다. 그러므로 고통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 …. 기쁨과 고난, 행복과 고통은 사랑하며 또 사랑받는 삶의 두 가지 면이다."

김도훈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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