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지일·최혁주·이연옥이 말하는 김순호, "예수밖에 몰랐다"

[ 선교여성과 교회 ] 김순호 선교사 이야기 ⑪

정안덕 박사
2022년 10월 18일(화) 11:26
평양신학교 남녀학우 일동. 1948년, 대보산에 올라. 1948년이면 김순호 교수도 무리 가운데 계셨겠다. 당시 여학생들의 숫자가 적지 않다(한국기독공보, 이연옥, 향유 가득한 옥합, "내 인생의 멘토인 여전도회 선배들" 2012-03-10 10면).
김순호는 사랑의 실천자였다. 그는 평양신학교 여성부의 교수직을 겸해 여자 기숙사 사감으로 섬겼다. 당시 도움을 받은 학생들이 적지 않았으니, 자신은 대단히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면서도 가난한 학생들을 기쁘게 도왔고, 병든 학생들에게는 치료비를 대주었으니, 늘 종의 섬김으로 '나 없는 생'을 살았다. 그러한 생활 방식은 그녀의 어릴 적부터, 그리고 장기간의 중국 선교사 생활을 통해 형성되어 온 것이었다.

1937~1938년간 산동 청도에서 그를 지척에서 지켜보았던 방지일은 이같이 김순호의 삶의 모습을 그렸다. "기도를 많이 하던 사람, 말보다 실천하는 사람, 있는 대로 도와주던 사람, 자기 생활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헌신하던 사람이었다."

1939~1940년간 길림 쌍양에서 동역한 최혁주는 김순호를 이렇게 인식한다. "그는 예수밖에 몰랐다. 돈이 있어도, 선교하는 일과 남을 도와주는 데만 썼다. 우리가 함께 일하던 쌍양은 대도시 신경에서도 90여 리나 떨어진 고을이었는데, 교회가 하나도 없는 그런 데였다. 김 선교사님은 거기서 한족 사람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중국 사람을 조선 사람과 똑같이 사랑하여, 그들을 인도하였다."

김순호의 외모는 엄격하게 보이나, 마음은 무척 다정다감하였다고 한다. 여전도회연합회와 한국의 여성 기독교 교육계를 위해 일생 귀한 삶을 살아온 이연옥은, 194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던 김순호 선교사에게 너무도 매혹된 나머지, 집에서 몰래 나와 평양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렇게 시작된 신학 공부였지만, 이연옥은 선생님이 너무 존경스럽고 두렵게 보여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김순호는 이연옥을 기숙사 사감 방으로 불러 이런 부탁을 했다. "조순덕 양이 폐가 약해 기숙사 음식으로는 영양이 부족한데, 너는 집이 유족한 것 같으니, 한 주에 며칠이라도 집에 데려다가 밥을 같이 먹도록 해라."

김순호가 직접 북간도에서 데리고 내려와 돌봐 주던 제자 조순덕. 그 말을 들은 이연옥은 속으로 너무도 황송한 마음에 그녀를 힘 다해 도왔으니, 그 후로는 셋이서 마치 모녀와도 같이 지냈다고 한다. 1948년 5월 8일 어머니날 셋이서 함께 찍은 사진을 조, 이 두 여성은 고이 간직하면서, 김 선생님을 일생 영적 어머니로 모시자고 다짐했다.

혹시라도 교회에서 귀한 음식을 가져다 줄 때면, 김순호 선생은 사감 방 옆을 지나가는 학생들을 일일이 불러들여 음식을 권하곤 했다. 또 신학교에서 월급을 타면 대부분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남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주었고 자기를 위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어쩌다 옷 한 벌이라도 생기면, '내 몸에 좋은 옷은 걸치지 않겠다' 작정한 양, 필요한 이에게 거저 다 주어 버렸다고 한다. 이웃을 위해 자기 '몸'을 쪼개 나누어 줌으로써,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던 사람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독신 여성 김순호는 신학교에서 일할 때뿐 아니라 때때로, 주위 사람들에게서 '이젠 가정을 가져보면 어떤가'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하니, 그럴 때면 한동안 진지하였다고 한다. 남을 위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 없는 삶'을 살아온 그의 생애가 남들에게는 거룩하고 숭고하게만 비춰질 수 있지만, 김순호는 남달리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으니, 그의 사랑을 이성에게 바치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었으랴?

그러나 그는 끝내 조카 김병숙에게, "나는 주의 제물이라"며 단념을 표시했다고 한다. 또한 김순호의 가까운 친지였던 강학린 목사의 자녀 강봉은에게는, "내가 결혼을 했더라면 선교사 노릇을 이렇게는 못했겠지. 내게는 선교사가 된 것, 이보다 더 기쁜 일이 또 있을까 싶어"라고 했으니, 강봉은은 그때 그 말을 기억에서 내내 지울 수 없다고 한다. 그리스도와 이웃을 향한 깊고 뜨거운 사랑이 너무도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에, 김순호는 한 남성에게 바쳐도 될 사랑을 그렇게 드리기로 다짐하였고, 그리 살았던 것이다.

정안덕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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