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식과 사랑

[ 인문학산책 ] 75

최신한 명예교수
2022년 10월 13일(목) 11:21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인간이 주체적 존재인 것은 이론과 실천의 근저에 자기의식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식은 지식의 획득과 의지 실천의 출발점이다. 신앙적 주체도 마찬가지다. 신앙인의 삶 근저에 하나님과 접촉하는 자기의식이 활동하고 있다. 자기의식은 어떤 대상에 대한 의식과 다르게 인간 자신에 대한 의식이다. 인간은 죽은 존재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이므로 자기의식은 곧 생명의식이다. 인간은 생명의식을 통해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신앙생활도 할 수 있다. 생명의식이 없는 삶은 독자성이 결핍된 맹목적 삶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특수한 형태는 사람으로 현상한다. 무한자와 유한자의 관계는 생명 자체이기에 거룩한 비밀이다.' 헤겔(G. W. F. Hegel, 1770~1831)의 '기독교의 정신과 운명'(1798~1800)에 나오는 문장이다.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다 하더라도 생명 그 자체는 무한하다. 생명의식은 인간의 유한한 생명 가운데서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을 의식하는 것이다. 유한한 생명 가운데 무한한 생명을 의식하는 한에서 유한자인 인간은 하나님과 통합되어 있다. 하나님이 인간 가운데 있으며 인간은 하나님 가운데 머문다. 헤겔은 이 생명을 거룩한 비밀이라고 말한다. 이 비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유한한 인간에게도 무한한 생명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생명을 무한한 생명과 유한한 생명으로 구별한다. 생각은 분리하는 힘이다. 생각은 모든 것을 분리하고 분리된 것을 규정한다. 이 규정은 판단이다. 재판정을 생각해보면 재판관의 판단은 심판으로 이어지고 심판은 형벌로 귀결된다. 재판관이 따르는 법률은 심판받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판단이다. 법률적 판단과 심판은 심판받는 사람에게 행사되는 강제력이다.

재판관의 판단처럼 인간의 생각은 무한한 생명과 유한한 생명을 분리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만 그와 대립하면 제한된 생명으로 떨어진다. 제한된 생명의 원인은 인간의 생각과 판단이다. 판단하는 생각과 달리 생명은 분리된 모든 것을 통합한다. 생명의 비밀은 통합에 있다. 생명은 분리를 통합하면서 심판받을 사람을 심판의 상태에서 구원한다. 생명 그 자체인 아버지는 판단하고 심판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생명이 아들 가운데 있으므로 아들도 심판하지 않는다. 사람의 아들은 심판하지 않고 분리하지 않으며 분열의 상황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사람의 아들은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에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아들에게도 생명을 가지게 한 이유는 심판받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무한한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의 통합은 상상이나 개념의 산물이 아니다. 생명의식은 생생히 살아있는 내면의 활동성이므로 그 자체가 영적 운동이다. 이 운동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 안으로 들어오며 인간은 무한한 하나님 안으로 스며든다. 생명의식의 운동은 하나님과 인간을 통합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사랑의 활동이다. 생명과 사랑은 동전의 앞뒤와 같다. 사랑은 분리된 존재를 방치하지 않고 하나로 통합한다. 사랑은 분리된 존재를 통합하여 하나의 존재로 만든다. 분리된 두 존재를 하나로 묶는 사랑은 생명을 확장한다. 하나님과 결속된 인간이 이전보다 더 큰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사랑이 만들어내는 생명의 힘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 존재는 홀로 있을 때보다 더욱 생동적인 사람으로 변한다. 그가 갖는 사랑과 생명의 감정은 주관적 느낌에 그치지 않고 타인과 공유하는 상호적 느낌이다. 개인은 사랑과 생명의 감정을 가지면서 개체의 범위를 넘어 전체로 확대된다. 모든 분리된 존재 및 유한한 존재가 사랑 가운데서 하나로 통합되기 때문이다. 이 통합은 분리된 존재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이들 간의 유기적 관계이다. 이것은 몸 전체와 지체의 관계와 같다. 손상된 지체를 가진 몸은 온전한 생명이 아니다. 온전한 생명은 생명을 구성하는 지체와 전체 몸이 상호 관계하는 유기체이다.

생명의식을 소유한 사람은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의식은 깨어있는 삶을 만들어내나 깨어있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생명의 주체라는 사실조차 망각한다. 생명을 소유했으나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없다. 깨어있는 삶의 주체는 사랑과 생명을 자기 밖의 사람에게 확인하려고 한다. 사랑과 생명을 소유했다고 하면서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깨어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입으로 사랑과 생명을 말하나 자기만족의 졸음 속에서 다른 사람과 공동체를 망각한다. 이런 사람은 생동적으로 활동하는 공동체와 무관하다. 신앙적 매너리즘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비밀은 생명이 사랑을 통해 전체를 아우른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조금씩 드러난다.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한다는 생명의 비밀은 결국 모든 존재를 하나로 묶는 사랑이다.

최신한 명예교수 / 한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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