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편하설 선교사에게 발급된 호조

[ 이야기박물관 ]

신상현 목사
2022년 09월 26일(월) 10:09
1900년 10월 대한제국 대한국외부가 편하설 선교사에게 발급한 호조, 24x24cm, 장로회신학대학교역사박물관 소장.
편하설(Charles F. Bernheisel, 1874~1958)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회 파송으로 1900년에 내한했다. 그는 평양선교부에서 평생을 사역하며 산정현교회를 창립했고, '신학반(Theological Class, 장신대의 모체)'에서 1905년부터 사도행전, 누가복음, 그리스도의 생애 등을 가르쳤으며 숭실전문 교수와 평양외국인학교 교장으로 봉사했다.

하노버대학과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한 26세의 청년 선교사 편하설은 1900년 10월 16일 부산에 도착한다. 그리고 10월 20일 지금의 외교통상부에 해당하는 대한국외부에서 국내여행 허가증인 호조(護照)를 발급받는다. 제96호로 발급된 이 호조에는 '미국인 뻔하이슬이 각도를 여행하기 위해 발급되었고, 함께 우러러 동행하여 가는 길을 돌봐주고 그 길을 막지 말며 돈을 요구하지 말라'는 내용이 직인과 함께 담겨있다. 10년 전 호주선교사 데이비스(J.H Davis, 1856~1890)에게 발급됐던 호조가 육로는 전라도와 경상도, 해로는 원산까지로 이동 제한이 있었던 것에 비해 편하설의 호조는 전국 각도로 허가 지역이 확대됐다. 그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매코믹신학교 동문인 마포삼열(S.A. Moffett), 소안론(W.L. Swallen), 이길함(Graham Lee), 배위량(W.M. Baird)이 서북지역의 선교를 주도하며 사역의 열매를 거두고 있었다. 평양의 장대현교회가 놀랍게 부흥함에 따라 1903년 남문외교회, 1905년 사창골교회에 이어 1906년에는 닭골(鷄洞)에 산정현교회를 분립하게 됐고, 이때 편하설은 산정현교회 창립을 맡게된다. 산정현교회의 설립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06년 1월 25일 도시에서의 필요성을 고려해 본 후에 남문과 중앙교회(장대현교회)지역에 새 교회를 따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내일부터 열흘간 주최하기로 한 전도대회를 위해 중앙교회가 너무 작으리라 생각되어 특별히 이 결정이 내려졌다. 나는 새 교회의 목사로 임명됐고, 좀 더 중심부에 교회를 세우기 전에는 동문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것이다. 나는 오늘 밤 기도회에서 교구 사람들을 만났다. 50~60명이 나왔다.'

편하설은 산정현교회 교우들의 깊은 존경 속에 1913년부터 한국인 담임목사들을 세웠고, 한국을 떠나는 날까지 교회와 함께했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으로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 강규찬이 옥고를 치를 때도, 1939년 신사참배 반대로 담임목사 주기철목사가 옥고를 치를때도, 산정현교회의 원로로서 일제의 '선교사 설교금지령' 에 굴하지 않고 주일강단을 맡아 설교했다. 편하설은 라이트(P.S. Wright) 목사에게 쓴 편지에서 '1938년 9월 안식년을 마치고 귀환해보니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와 부목사, 전도사가 감옥에 들어갔고, 그들은 정부가 모든 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을 거부한 이유로 체포됐다'고 기록했다. 그의 42년간의 선교는 1941년 일제의 강제추방으로 아쉬움 속에 마무리된다.

신상현 목사 /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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