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도전과 물음

[ 알기쉽게풀어쓴교리 ] 23. 기독교신론(1)

김도훈 교수
2022년 08월 24일(수) 06:10
주일예배마다 암송하는 것이 있다. 바로 '사도신경'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오늘날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많은 문제와 도전들이 이 고백과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밀리오리의 말대로 결국 오늘의 모든 상황은 하나님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첫째는 무신론자들의 직접적인 공격이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의 정체성이자 근본을 무너뜨리려 한다. 우리의 모든 것의 시작인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케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오늘날 매우 의미있고 중요한 일이다.

둘째, 인간의 자유에 대한 물음 역시 하나님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게 한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사르트르나 포이어바흐와 같은 일군의 무신론자들은 원래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나 그 자유는 하나님 때문에 억압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자유하려면 하나님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은 어떻게 하든 종교와 하나님 개념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하나님과 종교를, 포이어바흐는 인간의 잠재력이나 상상력의 투사로, 프로이트는 자신의 필요를 언제나 부모에게 기대는 유아적 환상과 같은 것으로, 마르크스는 정치적·경제적 억압과 착취를 정당화시켜주는 민중의 아편으로 생각했다.

셋째는 이 땅의 고난과 어두운 현실, 결국 이것도 하나님의 물음으로 이어진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전능하시고, 선하시고, 자비하시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이다. 그러면 당연히 이런 질문을 받을 것이다.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다스린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는 왜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가 하고 말이다. 전통적인 하나님 전능성의 개념에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 사건이다. 아우슈비츠와 부켄발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엘리위젤은 당시 사람이면 누구나 묻고자 했던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어느 한 랍비의 절망적 고백을 통하여 대신해 주었다. "나는 내 눈으로 이들이 여기서 자행하는 짓들을 보고 있다. 도대체 자비하신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은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아니 어떤 사람이 자비의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나?" 처참한 고난의 경험 속에서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은 바로 하나님 질문이었다.

넷째는 과학의 발전 역시 결국은 하나님 질문으로 이어진다. 오늘 우리 시대의 하나님 질문은 과학 기술로부터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끊임없이 올라가는 과학과 기술의 바벨탑 앞에서 도대체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많다. 진화론의 등장은 전통적 하나님 창조신앙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뇌과학은 모든 종교 현상이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뇌의 작용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종교는 뇌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어느덧 자연과학 자체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인류의 구원자로 자처하고 있다. 과학의 수많은 발견은 전통적 하나님 개념의 설 자리를 자꾸 축소시키고 있다. 과학 시대에 여전히 물어야 할 동일한 질문은 "오늘날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오늘날의 심각한 환경파괴 역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물음을 묻게 한다. 일군의 학자들은 오늘날의 거대한 환경파괴가 기독교 때문이라는 비난을 서슴치 않는다. 기독교는 오로지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두어 마치 하나님이 인간만 사랑하시는 것처럼, 자연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어서 파괴해도 되는 것처럼 오인하게 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말할수록 자연 파괴가 가속된다는 비판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를 변증해야 하고 어떻게 성경적 하나님을 말해야 하는가를 진정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섯째, 종교다원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오늘의 사상적 흐름도 하나님 질문을 던진다. 이외에도 신론과 관련한 여러 도전들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앞으로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수많은 도전과 질문 앞에서 침묵해야 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을 물어야 한다. 오늘의 무신론자들 앞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오늘의 과학 앞에서, 폭력과 가난과 억압과 팬데믹에 신음하는 영혼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외치는 고통과 탄식의 외침을 들으면서, 각종 정신 사조들의 질문 앞에서, 하나님을 물어야 하며 하나님을 고백해야 한다. 절망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절망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고백해야 한다. 절망적이고 어려운 시기에 다시 한 번 고백해보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김도훈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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