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양칼럼 ]

조택현 목사
2022년 07월 20일(수) 08:16
발은 이동하는데 요긴하다. 아니 필수적이다. 발로 걷는 것은 건강에 유익하다. 가장 기본적인 운동이 걷기 아니던가. 손, 머리, 허리 등을 활용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움직임은 작다.

발은 걸으면 몸 전체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운동은 발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손을 주로 쓰는 운동이라 할지라도 결국 발이 움직여서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할 수 있다. 건강이 좋지 않게 되는 수순 가운데 발을 쓰지 못하는 것이 첫 번째라고 한다. 발은 그만큼 건강과 직결되어 있다. 건강 뿐 아니라 삶의 모든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최고의 이스라엘 성지순례는 발로 걷는 것이라고 한다. 북쪽의 단에서부터 남쪽의 브엘세바까지 이른바 땅 밟기 하는 것. 그 옛날 그 땅을 걸었던 아브라함과 여러 예언자들, 예수님과 사도들과 같은 땅을 밟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통시적인(diachronic) 차원과 그 때와 지금을 동시대의 눈으로 바라보는 공시적인(synchronic) 차원까지 공유할 수 있음에야.

시대만 다를 뿐 같은 땅에서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은 과연 어떤 발걸음을 떼었을까? 이동은 접촉을, 접촉은 갈등 내지는 소통을, 갈등과 소통은 진통과 수렴의 과정을 거쳐 사회적 합의에 다다른다. 옛날 이동의 첫 번째 시작점엔 늘 발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다다를 때에도,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고 십자가 길을 걸어가실 때에도 역시 발을 썼다. 예수님의 경우, 이동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많은 접촉을 만들었고, 그 접촉에서 바리새인과는 갈등이, 따르는 무리들과는 소통이 생겨났다. 예수님을 두고서 한편에서는 '메시야'라 하고, 그와는 달리 다른 한편에서는 '신성모독자'라고 하는 각각 다른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했던 지역의 형제들이 어떠한지 살피고자 했는데 마가와 동행하는 문제를 두고 갈등한다. 바울은 마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바나바는 그를 데려 가자고 한다. 결국 심하게 다툰 뒤에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각각 다른 선교지로 나아간다. 싸운 후 그들이 떼었던 발걸음의 품새는 어떠했을까. 차분하고 담담했을까, 아니면 거칠고 흥분된 모양새였을까.

족적은 삶의 궤적으로 남는다. 한번 남겨진 족적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며 발걸음을 잘 떼어야 하겠다. 데마는 바울을 떠나 세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바울과 함께 했으면 그의 발걸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을 텐데 안타깝다. 데마의 족적은 그의 삶 전체를 반영한다. 가치 있고 가치 없는 삶의 차이가 발걸음의 향방에서 결정된다. 발은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 마음 없이 발을 떼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 쪽으로 발을 떼었을 때 그의 마음은 이미 예수님을 떠났었다. 베드로의 마음이 붕 뜬 채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함께 하겠다고 말했을 때 사실 그의 마음은 어느새 예수님을 떠났고 부인하는 쪽으로 발걸음을 시나브로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어딘가로 발걸음을 떼기 전에 그 다음에 자기가 있게 될 곳과 거기서 빚어질 상황을 미리 그려보는 것은 지혜롭다. 모름지기 가야 할 곳과 가서는 안 될 곳을 가려야 하겠다. 오늘도 우리는 그 어딘가로 걸어간다. 거기에서 우린 무엇인가를 할 것이다. 아예! 좋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조택현 목사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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