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양칼럼 ]

조택현 목사
2022년 07월 13일(수) 08:30
손은 무엇을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보편적이자 필수적인 지체이다. 예로부터 일을 한다고 할 때 그것은 손을 사용하는 걸 가리켰다. 수저를 드는 것에서부터 세수할 때, 글씨를 쓸 때, 운전할 때,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할 때, 우리는 손을 사용해야만 한다. 그런데 손을 쓰면서도 그 손을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는다. 외려 손에 잡혀 있는 것에 더 신경 쓴다. 몸의 일부인 손이 매우 익숙한 것이기에 그런가 보다.

예수님은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한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오른 손에 잡혀 있는 것은 구제라고 할 수 있겠다. 왼손을 의인화하여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삼으신 채 구제의 은밀성을 묘사하셨다.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고자 하는 손, 이 두 개의 손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구제를 완성해 낸다는 것이다. 행동과 기억의 분리작업이 여기서 나타난다. 행동한 것을 기억하지 않을 때 구제는 비로소 하나님의 구제가 된다는 것. 반대로 행동과 기억이 결합될 때 불편한 것들이 생겨난다. 베푸는 사람은 보람과 만족감을, 베풂을 받는 사람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굴욕감을 가질 수 있다.

이 불편한 상황을 누가 먼저 해결해야 하는가? 구제하는 사람이다. 그 해결책은 오른 손이 한 것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기억이 만들어 낸 난감한 결과를 보여 준다. 양의 무리나 염소의 무리나 좋은 일 한 사람들이었다. 염소의 무리는 행동과 기억을 단단하게 결합한다. 시나브로 자기 의를 지향하게 된다. 양의 무리는 행동과 기억을 분리할 줄 안다. 갈수록 자기 의를 지양하게 된다. 이들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엄정했다. 보이는 손이지만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보이는 손은 자기 의를 나타내려는 신앙인격을, 보이지 않는 손은 자기 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신앙인격을 보여 준다.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 벨사살 왕이 큰 잔치를 베풀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그릇으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갑자기 석회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쓴 글씨이다. 다니엘이 그 뜻을 해석한 대로 벨사살은 죽고 바벨론은 망한다. 나라는 메대와 바사로 나뉜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글씨를 보긴 보았지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결국 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때 그들의 눈에 하나님의 손은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된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줄 알아야 하겠다. 율법조문(문자)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까(고후 3:6). 그 영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니, 그 손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이기에.

예수님께서 손으로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을 때 그의 눈이 밝아졌다. 맹인과 그의 아버지가 경험한 기적이었다. 바리새인들이 맹인의 아버지에게 물었지만 아들이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되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출교 당할 것이 두려워서 그랬다. 맹인은 당당하게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다고 말한다. 그 때 예수님의 손은 맹인에게는 보이는 손이지만 그 아버지에게는 보았으면서도 보지 않았다고 믿고픈 손이었다.

보여서는 안 될 나의 손이 있다. 보아야 할 하나님의 손이 있다. 보게 해 주시는 예수님의 손이 있다. 이 모든 손이 늘 우리에게 있기를!



조택현 목사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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