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안에서 자유로웠던 진정한 순례자

고용수 교수가 전하는 기독교교육학자 주선애 교수의 신학과 삶

고용수 명예교수
2022년 07월 06일(수) 07:43
선생님은 교수로서 한국 기독교교육학의 선구자였을 뿐 아니라, 고아, 빈민, 소외된 여성, 탈북자, 등 사회적 약자로 총칭되는 '작은이'들의 벗이요, 어머니요, 목자이셨다. 선생님은 1924년 2월 20일 평양에서 4대째 기독교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선생님이 어렸을 때 작고하셨다. 임종시(23세)에 어머니께 '선애 하나, 여자이지만 잘 키워서 기독교 선생을 꼭 만들어라'는 유언을 남기고 가셨다.

선생님은 20~21세에 용현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시 그녀의 생애의 방향을 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한권의 책을 통해 깨달았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사선을 넘어서'를 읽고서 "삶이란 섬기는 것이지, 나 혼자만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선생님 나름대로의 인생의 꿈을 붙잡게 되었다. 1948년 38선을 넘어올때는 '사선을 넘는' 고난의 행진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월남 이후 서울에서 장로회신학교 졸업(3회)했고, 여전도사(부산), 고아원 원장(대구), 대구고등성경학교 교사 겸 기숙사 사감으로 섬기다가 유학의 길이 열려 뉴욕성서신학교에서 2년간 기독교교육학 전공으로 종교교육 석사(MRE)학위를 취득했다.

1958년 숭실대학 전임교수로 취임하면서 한국에서 최초로 기독교교육학과의 설립 허가를 받았지만, 교수없는 학과장이 되어 4년제 커리큘럼을 혼자 만들고, 강사 선정, 수업 진행과 학생 모집 등 학사운영의 모두를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본교단 총회 교육부 산하에 커리큘럼위원회를 조직하여 교단의 교회교육 커리큘럼개발에 착수하였고, 1972년에 총회의 인준을 받아 '기독교교육 목적'과 교회학교 계단공과 '성서와 생활'을 교단 최초로 완성, 발간했다. 1968년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과 교수로 부임해서 1989년 정년 은퇴하기까지 선생님은 대학원 기독교교육학 석·박사과정, 대학내 부설기관으로 기독교교육연구원을 개설, 운영하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 그리고 교수로 재임 중에 여성교역자 양성과 여성의 리더십개발을 위한 '여성지도자교육원', '평생교육원'을 개원했다.

선생님의 교육사역은 대학내에만 머물지 않았다. 재임중 본교단 여전도회전국연합회회장, 정년 은퇴 이후에는 대한 YWCA 전국연합회 회장, 탈북자교육을 위한 종합회관 관장, 사단법인 세빛자매회 이사장 등을 맡아 몸으로 섬기는 리더십의 본을 보여주셨다. 정년 은퇴 이후 한국교회를 위한 영성운동을 꿈꾸면서, 경기도 포천에 위치한 은성수도원을 매입해서 장신대에 영성훈련을 위해 기증했다. 그리고 독신자 여선교사들을 위한 은퇴관 건립을 위해 선생님의 통장 전부(4억 여원)를 종잣돈으로 헌금하고, 건축모금운동을 전개해서 2021년 11월 5일 준공식행사를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지난 6월19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어머님의 신앙의 유산과 미국 뉴욕성서신학교의 복음주의 신학사상이 선생님 교육신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요약하면 첫째로, 섭리신앙이다. 지금까지 실천에 옮긴 교육사역을 회고해보면, "내가 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한 창조주의 섭리라고 나는 믿는다."(회고록 406쪽).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성이다. "1946년 어느날 밤 기도하던 중 문득 주님의 못박히신 손, 피흘리신 손을 생생하게 보았다. '이것이 너의 죄를 위해 이미 사한 증거다'는 주님의 음성에 나는 '할렐루야! 하며 벌떡 일어섰다. 아멘! 아멘!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뜨거워져 오는 내 가슴을 손으로 껴안고 무한한 기쁨과 해방감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 하나님은 나의 관념적 신앙을 체험적 신앙으로 바꾸어 주셨다."(회고록,78~79쪽) 회심이후부터 선생님은 더욱 철저하게 "네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라 이웃(작은이들) 사랑 실천에 기쁘게 헌신하셨다.

셋째로, 청지기 정신이다. 선생님은 재정문제에 있어 철저한 생활원칙을 지켜왔다. 남편(김명식 장로)을 위해 평생 기도해 온 내조의 열매를 하나님께서 은퇴 후 되돌려주셨다. 포천에 있는 은성수도원을 자진해서 장신대에 기증했고, 남편이 세상 떠나기 전 현재의 아파트와 그 외 남은 집 한 채를 모두 장신대에 기증되도록 변호사와 공증을 했다(320쪽). 넷째로,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의 유산(기도의 영성)이다. 대학시절 소그룹 미팅에서 취미를 물었을 때, '기도'라고 대답할 정도로 선생님은 '기도의 맛'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 유학시절 틈틈히 13층 옥상 조그만 창고에서 철야기도를 했고, 미국 학생들에게 '나에게 기도는 생명줄과 같다.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만, 기도만큼 가치있는 것은 없다'고 간증도 했다.

대학원 세미나 수강생들이 선생님댁에 가서 인터뷰한 내용 중 '많은 신학자중 특별히 영향 받은 신학자에 대한 질문을 받고, 호레이스 부쉬넬' 이라고 응답했다. 부쉬넬은 현대 기독교교육의 아버지로서 그의 명저 '기독교적 양육'(1847년)에서 소개된 기독교 가정교육의 사회화 이론은 선생님의 기독교교육의 이론형성의 뿌리가 되었다. 안셀름 그륀의 저서 '황혼의 미학' 3장을 보면, "성장하고 새로워지려면 오래된 것을 끊임없이 놓아버려야 한다 … 이제 노인의 과제인 '놓아버리기'는 재산, 건강, 관계, 권력, 마지막으로 '자아'를 놓아 버려야 한다. 자아를 버리는 사람은 관계와 지식을 잃지 않는다"는 글이 떠오른다. 선생님은 인간으로서의 자기가치를 관계나 지식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진정 자유로웠고, 실로 주님 안에서 자신을 내려 놓아버린 진정한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다.

고용수 명예교수 / 장신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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