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양칼럼 ]

조택현 목사
2022년 06월 29일(수) 08:10
눈은 보는 데 충실하게 만들어졌다. 눈이 갖는 시각 기능은 자기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모든 자연을 볼 수 있게 한다. 보이는 자기 외부의 것을 내부에 영상으로 담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눈은 가히 환상적인 기관이다. 그런가 하면 눈은 자기 감정을 표출하는 창구 역할도 한다. 마음이 따뜻할 때 눈은 맑고 깨끗한 빛을 띠지만 잔뜩 신경 쓰고 불편할 때엔 눈은 날카롭게 번뜩인다. 기쁠 때엔 눈웃음을 치지만 슬플 때엔 눈물이 흘러나오는 곳이 눈이다. 이처럼 눈은 자기 내부의 것을 외부로 드러낼 수도 있는 기관이기도 하다. 또한 눈은 자기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가름하는 판단 기능을 갖는다. 물론 이 기능은 눈에서 뇌를 거칠 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이상과 같이 눈은 시각과 감정과 판단 기능을 가진 기관으로서 자기의 외부와 그리고 자기의 내부를 상호 연결하는 하나의 통로 역할을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신 후 그것을 보신 하나님의 마음은 이랬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10.12.18.21.25). 특히 사람을 만드심으로써 창조를 다 완성하신 여섯째 날에 쓰신 단어는 그 앞에 '심히'를 덧붙이셨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하나님께서 어떤 하나님이신지 알 수 있다. 창조 때로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자상하시고 따뜻한 눈빛으로 세상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첫 번째 범죄는 눈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뱀이 하와를 유혹하면서 했던 말은 이랬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하와는 그 나무를 '보고' 먹게 되었고(창 3:6) 이내 아담과 함께 열매를 먹은 후 그들의 눈은 밝아졌다(창 3:7).

여기서 눈은 복합적인 개념을 갖고서 나타난다. 먼저 시각기능적으로 동산 중앙의 나무를 보게 되었고, 감정기능적으로 그 열매를 먹은 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이 들떴고, 판단기능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이 더 올바르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외부의 잘못된 것들이 눈을 통하여 아담과 하와의 내부로 속절없이 들어와서 결국 그들을 망가뜨렸다.

그 눈은 오늘날도 여전히 죄의 한 축을 담당한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눅 6:22~23)이라고 하셨다. 눈이 빛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영혼과 삶이 환해질 수 있음이다. 예수님은 온 몸이 밝아지게 되는 전제조건을 '성한 눈'으로 제시하셨다. 성한 눈이란 단순히 육적인 눈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적으로 건강한 눈을 가리킨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 6:9)고 말했는데 예수님은 그 말씀을 자주 인용하셨다. 그것은 모든 것을 보되 제대로 올바르게 보라는 권면이자 선포이셨다. 창조 때 의도하셨던 눈의 본래적인 개념에 충실하여 눈을 사용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 왜곡되거나 편향되지 않고 올곧게 볼 줄 알고, 잘못된 개인적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아래 객관적으로 볼 줄 알고, 잘못된 기준과 가치관에 기대어 오판하지 않고 올바르게 판단할 줄 아는 눈이 참으로 복 있는 눈이다.



조택현 목사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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