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떨어뜨려 둔 이유

[ 목양칼럼 ]

이호 목사
2022년 06월 01일(수) 08:20
대학 졸업 후 학사장교로 전방에서 군 복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자대 배치를 받고 업무와 훈련이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차츰 군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사단의 군종참모가 찾아왔다. 나보고 부대 안에 있는 교회 전도사로 섬기라는 것이다. 나는 입대 전에 신대원을 입학하기는 했지만 한 학기도 이수하지 않았고 입학과 동시에 군복무를 위해 휴학을 한 상태였다. 제가 뭘 알겠냐며, 저는 전도사로 사역할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래도 군종참모는 신대원에 입학했으니 전도사로 군장병들이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기를 바라며 부탁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상식으로는 신대원 입학했다고 전도사로 섬긴다는 게 이해가 안 되어 끝내 하기 어렵겠다고 고사하였다.

이런 일이 있고 난지 얼마 안 되어 상급 부대에서 비무장 지대(DMZ) 안에 있는 휴전선 감시 초소(Guard Post)로 파견할 간부를 차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전입한 지 100일이 안 되는 초급간부는 제외하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 부대에 해당되는 간부는 나밖에 없었다. 당시 GP에 들어가면 외출·외박이 금지된다. 자원한 것도 아니고, 내 밑에 후임들도 있는데, 새로운 규정으로 이제 익숙해진 자대를 떠나 파견을 나가야 되는 상황이 무척이나 못마땅했다.

군대는 모든 일이 상하에 의한 명령과 복종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상황에서도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따라서 항상 '선보고 후조치'를 해야 한다. 그런데 GP는 상황에 의한 신속한 초동 조치를 해야 하는 작전지역이므로 유일하게 '선조치 후보고'를 하게 되어 있다. 만일 적의 도발이나, 침투 시 즉시 조치하지 않으면 아군이 입을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방이라도 훈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포탄으로 근무하는데, GP에서는 항상 실탄을 소지하고 근무를 한다. 그래서 간부들의 주요 업무가 실탄이 들어있는 '탄창 확인' 작업이다. 매일 총알을 몇 발 지급했고, 개수대로 수거되는지를 실제로 일일이 셈하며 확인해야 한다. 한발이라도 분실하면 실탄이 나올 때까지 찾아야만 한다. 단순하고 쉬운 일 같지만, 막상 신경이 많이 쓰였고, 피로도가 높았다. 더구나 12시간 교대근무는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그때 내게 주신 말씀이 디도서 1장 5절 말씀이다. 당시 개역한글 성경으로 읽는데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이라는 말씀이었다. 그 말씀을 읽는데 주님이 나에게 이 최전방에, 이 비무장 지대에, 실탄을 소지하고 근무하는 이 GP에 떨어뜨려 둔 이유가 있다고 깨닫게 해 주셨다.

그 말씀에 힘입어 나는 밤낮이 바뀐 채 근무하는 병사들과 함께 QT를 하고, 수요일과 주일에 예배를 인도하며 함께 예배를 드렸다. GP까지도 찾아오는 이동 편의점 박스카(일명 '황금마차')에서 초코파이를 구매하여 나누면서 은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사실 신대원 공부도 해 보지 않았는데, 실질적으로는 전도사 사역을 하게 된 셈이다. 지금도 바빠서 정신이 없을 때나, 매너리즘에 빠져 있을 때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이라는 말씀은 그때의 일을 기억나게 해 주며 순식간에 나를 사명의 자리로 세워주신다.



이호 목사 / 종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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