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의 힘

[ 시인의눈으로세상보기 ]

이재훈 시인
2022년 05월 10일(화) 09:50
얼마 전 일산호수공원에서 국제꽃박람회가 열렸다. 코로나 방역이 풀리면서 꽃축제가 열린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꽃구경을 하러 왔다. 몇 천 만원하는 분재도 보고 세계 각국의 꽃뿐 아니라 플로리리스트가 제작한 작품들도 감상했다.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힐링정원에는 튤립 등 다양한 꽃무리가 즐비했다. 내친김에 화훼 직거래장터에서 카라와 페어리스타, 수국, 다육식물 등 화분 몇 개도 구입했다. 꽃구경은 사진이 남는 것이기에 가는 곳마다 사진도 많이 찍었다. 꽃 앞에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면 나이가 든 것이라 했던가.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꽃 앞에서 사진 찍는 것이 창피하지도 않고 마냥 좋아 이리저리 포즈를 잡았다. 봄날의 꽃구경은 겨우내 막혔던 마음이 힐링되는 제대로 된 구경이다.

전국에 정말 많은 꽃구경이 있다. 저마다 특색 있는 꽃을 자랑하고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지역축제로 꽃잔치를 벌인다. 꽃이 그 지역의 대표적인 명물인 곳도 많다. 우리나라는 꽃구경 천지다. 봄날에 있는 꽃축제만 해도 여럿이다. 제주 유채꽃축제, 영주 소백산 철쭉제, 태안 세계튤립꽃박람회, 태화강국가정원 봄꽃축제 등 전국이 꽃잔치를 벌인다.

꽃을 좋아하는 것은 계절에 민감한 감수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계절을 탄다고 흔히 얘기한다. 봄이면 봄을 타고 가을이면 가을을 탄다. 봄을 탈 때는 흐드러지게 핀 들꽃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긴 겨울을 견디고 난 푸른 생명은 눈물겹게 아름답다. 봄철 가장 인기있는 꽃은 벚꽃이다. 지역마다 벚꽃 축제가 열리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하얗고 탐스러운 꽃들이 가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은 탐스럽고 앙증맞다. 벚꽃이 떨어져 흩날리면 마치 눈이 내리는 것처럼 낭만적인 풍경을 만든다.

봄철 화려하게 피었다가 갑자기 언제 피었냐는 듯 떨어지고 마는 벚꽃은 마치 우리의 삶을 닮았다. 화려한 것은 잠깐이고 지는 것 또한 순간이다. 화려한 꽃은 바람에 의해 쉽게 떨어진다. 쉽게 피는 꽃은 작은 흔들림에도 버티지 못하고 지상으로 낙하하고 만다. 쉽게 성공하고 쉽게 영예를 얻을 때 작은 고난에도 쉽게 좌절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꽃이 주는 성찰이다. 그것을 깨닫는데 평생이 걸린다. 물론 나또한 인간의 순리를 아직 모른다. 아직 평생이 모자라다.

꽃이 떨어지는 것은 꽃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의 모습이다. 꽃은 자신의 생명을 다한 후 가지와 이별하고 장렬히 땅으로 떨어진다. 꽃이 떨어지는 것은 소멸의 과정이다. 사람들은 꽃이 지는 것을 아름답다고 한다. 꽃 지는 모습이 예쁘다고 환호한다. 소멸의 미학을 깨달은 것일까. 꽃의 죽음을 반기니 말이다.

이형기 시인은 꽃이 떨어지는 모습을 소멸의 미학으로 승화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낙화')고 했다. 꽃잎은 가야할 때가 언제인지를 정확히 알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과 작별한다. 또한 꽃이 떨어지는 것을 '결별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세상과의 이별이 축복이라는 역설을 시인은 노래한다. 시인은 이어 "나의 사랑, 나의 결별/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내 영혼의 슬픈 눈"이라고 시를 마무리한다. 결별이 사랑이며, 결별을 겪고 난 후의 영혼은 성숙한 존재가 된다. 성숙한 영혼은 슬픈 눈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아이러니도 인식할 수 있다.

왜 소멸이 축복일까. 우리는 매일 소멸을 겪으며 산다. 매일 작은 존재와 시간과 이별하며 살아간다. 지금 현재도 시간과 이별하는 중이다. 잘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보내는 것 또한 중요하다. 가야할 때를 알고 잘 떠나는 것도 중요하다. 꽃잎이 땅에 떨어지면 흙으로 돌아가 또 다른 생명의 자양분이 된다. 소멸이 생명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소멸이 축복이라는 인식은 그래서 올곧다.



이재훈 시인/건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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