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운 해결책? 그 질서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 선교여성과 교회 ] 교회 내 여성의 역할 확장 ②

김호경 교수
2022년 04월 20일(수)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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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반적으로 취향, 문화, 습관이라 부르는 것들은 자연스럽거나 순수하게 개인의 입맛에 따라 선택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훈육을 통해 의식되지 않은 특정한 강요에 따라 형성된다. 그것은 '상징적 폭력'을 전제로 하며, 결국 개인을 서로 다른 구획 속에 자연스럽게 가둠으로써 기존의 불평등한 관계를 지속시킨다.

즉 '구조화된 구조'와 '구조화하는 구조'가 상호 작용함으로써, 특정 계급의 아비투스는 진리가 되고 보이지 않는 억압은 지속된다. 부르디외의 상징적 폭력이라는 개념은 한 계급의 문화적 전횡이 어떻게 합법적인 것으로 변형되는가를 보여주며, 한 사회에서 지배적인 문화는 바로 지배계급의 문화임을 폭로한다.

상징적 폭력을 통해 정당성과 보편성을 부여받은 특정 계급의 아비투스가 진리로 인식되는 오인의 과정은, 결국 권력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부르디외는 자신의 상징적 폭력이라는 개념으로 푸코를 공격한다. 상징적 폭력이란 사회적 행위자에게 가해지는 복합적 형태의 권력을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피지배자가 이것을 권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교회 내 여성의 문화

이러한 상징적 폭력으로 인해서, 예를 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 내의 성차별적 현상을 특이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남자의 특성과 여성의 특성을 고정화시켜서 남자의 일과 여자의 일을 전형적으로 분리시키고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로 소개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는 '믿음'을 저해하는 불경건한 인식으로 전락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성차별적인 문제나 성폭력이 발생하더라도, '은혜로운 해결책'을 선호하며, 부분적인 것을 전체적으로 확대시키면서 침소봉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교회에 질문하고 싶은 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은혜이며 누구를 위한 믿음인가? 하는 점이다.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것이 누구에게 문제가 되며, 은혜로운 질서의 수혜자는 과연 누구인가?

교회에서 생긴 성폭력에 대해 '논의를 통해 함께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가 50.8%에 달했지만, 이 경우도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은,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논의할 것인가?'이다. 한국교회가 전형적으로 남성중심적 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교회에서 여성의 권리나 여성신학적 이해를 말하는 것이 여전히 불길하고 불온한 현실임을 감안한다면, 이 '논의'가 여성을 위한 것일지는 의문이다. 이 모든 '은혜'의 혜택은 궁극적으로 교회의 질서를 움직이고 교회의 질서가 지향하는 남성일 가능성이 크다.

교회에게는 은혜로운 해결책이, 피해 여성 당사자에게 은혜롭지 못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교회에 만연한 남성중심적 구조와 교회의 영적인 질서가 실제로는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불리하고 불편한 현실을 덮어주는 기제 중 하나가 '은혜'이다. 은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왜곡할 수 있는 통로이다. 은혜에는 이성이나 이치가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가 되는 것은 은혜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은혜를 경험하거나 전해주거나 규정해주는 존재들이 진공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성폭력이나 성희롱의 문제에 있어 세속적 법정이 남성들의 시각을 옹호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교회는 말 못하는 여성들보다는 스스로를 변호하는 남성들의 손에 하나님의 은혜를 놓아준다.

안타까움은 여기에 있다.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여성은 분란을 일으키는 자가 된다. 그들은 교회 내 소란꾼으로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성차별적 경험을 한 여성이 교회에서 환영받기 위해서, 그 여성들이 택할 길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임할지도 알 수 없다.

김호경 교수 / 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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