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적 폭력' 교회 안에서는?

[ 선교여성과 교회 ] 교회 내 여성의 역할 확장 ①

김호경 교수
2022년 04월 13일(수) 10:13
사진은 여전도회전국연합회 2022년 1학기 개강예배. / 한국기독공보
정당한 문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부르디외(P. Bourdieu)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이해하는 실존주의적 사유체계와, 사회의 영향력과 결정력을 강조하며 사회에 대해 인간의 능동적 사고력과 자발적인 행동의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구조주의적 사유체계 모두를 비판한다.

부르디외는, 개인의 행동이 주관적 의지를 통해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행동은 과거로부터 누적된 사회적 관행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강조한다. 개인은 사회적, 역사적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사회와 인간의 이러한 상호성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온 부르디외의 개념이 '아비투스'(habitus)이다. 아비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habitude'(습관)에서 연유한 것이다. 여기에는 '에토스'(ethos, 실천적인 상황에서의 원칙 혹은 가치)와 '헥시스'(hexis, 육체의 성향, 육체와의 관계로서 개인의 역사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개인에게 내면화된 태도)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 어떤 '습관'을 갖는다고 할 때, 그것은 마음이 일정한 방향을 갖는다는 의미와 그러한 방향에 따라 몸을 움직인다는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그러므로 부르디외가 사용하는 아비투스란 개념은 원리적으로 보아, 일정한 방향을 갖는 마음과, 일정한 방향으로 행동하는 몸을 통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아비투스는 특정한 개인의 몸속에 체화된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것이며 또한 그 개인이 놓여 있는 사회적 위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것이다. 부르디외가 아비투스를 '구조화된 구조'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체계적인 행위 양식의 형태로 몸속에 자리잡은 사회질서이다.

그러나 또한 아비투스는 구조화된 구조일 뿐만 아니라 '구조화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아비투스는 불평등한 구조를 재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아비투스를 통해 기존의 지배-피지배 관계가 계속 유지되고 재생산된다. 이것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반복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아비투스가 사회구조를 반영하는 구조이며 또한 사회구조를 다시 만들어내는 생성의 구조라고 할 때, 그것은 아비투스가 현실을 지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 해석 틀인 동시에 실천을 만들어내는 당사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디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비투스가 계급적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개인은, 특정 계급이 그들의 생존환경을 조성함으로써 만들어진 영구적이면서도 변동 가능한 성향체계인 아비투스를 체화한다.

이때, 지배계급은 자신의 아비투스를 발현해서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실현한다. 반면, 민중계급은 내면화된 아비투스로 인해 지배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아비투스를 정당화, 보편화시키는 작업을 하며, 민중계급은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작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이렇듯 다양한 집단 간의 이해 관계를 억누르고 은폐하면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보편적으로 만드는 것을 '상징적 폭력'(violence symbolique)이라고 부른다. 상징적 폭력은 집단적 기대들과 사회적으로 주입된 믿음들을 토대로 한다. 이 때문에 '복종이라고 지각조차 되지 않는 복종들을 강요하는 폭력'을 의미한다. 단순하게 말해, 상징적 폭력은 사회적 행위자의 암묵적인 동조 하에 그에게 행사되는 폭력의 형식이다.

부르디외는,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그에 따라 행사되는 폭력을 인정하는 것을 '무지'라고 칭한다. 상징적 폭력은 지배에 대한 지각 없이 행사되는 '오인된 폭력'이다. '오인'을 통해 발생하는 상징적 폭력은 '구별짓기' 전략으로 공고히 된다. 구별짓기, 즉 차별화 양식은 계급적 구분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적대관계, 즉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하는 폭력의 한 양식이다.

이에 따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취향, 문화, 습관이라 부르는 것들은 자연스럽거나 순수하게 개인의 입맛에 따라 선택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훈육을 통해 의식되지 않은 특정한 강요에 따라 형성된다. 그것은 상징적 폭력을 전제로 하며, 결국 개인을 서로 다른 구획 속에 자연스럽게 가둠으로써 기존의 불평등한 관계를 지속시킨다.

김호경 교수 / 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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