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발자취와 기능

[ 인문학산책 ] 51

임채광 교수
2022년 03월 30일(수) 06:50
델포이 신전의 147개 격언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성'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고, 동물과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했다. '영혼삼분설'을 주장했던 플라톤의 경우 마음을 이성과 기개, 욕망으로 나누고 이성을 그중 가장 높은 수준으로 분류하였다. 이성의 우위를 인정했던 고대철학의 전통은 중세와 근대, 현대 사상까지도 이어지게 되었다. 이성의 가치를 중요시해 온 서구인들의 문화는 이들의 일상과 세계관에 미친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이성은 서양의 긴 역사에 숨은 주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첫째,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와 참된 지식은 이성적 활동의 결과물이다. 고대철학자들은 지식을 두 유형으로 구분했는데, 이성의 순수한 추론과정을 통해 도출해낼 수 있는 지식을 '에피스테메' 그리고 육신의 감각적 체험과 같이 현실세계에 주어져 있는 물리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는 지식을 '억견(臆見)'이라고 하였다. 철학은 에피스테메를 얻기 위한 순수한 이성적 탐구과정이다. 이로서 희랍인들은 특별히 유익이 없는, 경험적 익숙함과도 무관한 진리를 추구하는 첫 민족이 되었다.

둘째, 이성은 기독교 사상뿐만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삶에 가이드 역할을 해 왔다. 신학이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철학적 정립의 성격을 갖듯이, 이성을 활용한 사상적 체계가 곧 기독교 사상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의 영혼은 "기억"과 "이성" 그리고 "의지"로 나눈다. 이에 모든 진리의 원천이 하나님뿐이기에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할지라도 무가치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아퀴나스의 경우 이성의 가치는 더욱 중시된다. 믿음의 영역과 계시의 영역을 구분하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이성과 적대적 대립의 관계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성은 계시를 명확히 보여주고 설명해주는 보완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오캄에게 이성은 신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어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에게 진리는 언어적 추론과정에서 모순을 허용하지 않는 이성적 활동이다.

셋째, 근대는 이성의 회복과 사회적 실천이라는 과제를 구현한 시대였다. 과학과 기술은 그 촉진제였고, 인본주의적 가치관은 그 결과물이었다. 그 모든 과정을 주도하고 지배한 힘이 인간의 이성이었다. 근대가 '이성의 시대'라 불리는 이유이다. 이성은 개인에게 있어서 일종의 생존장비가 되었다. 합리론자들은 사람이 출생과 함께 이성의 권능을 보유하게 된다고 보았던 것에 반해, 경험론자들은 이성을 학습의 결과물이라 설명하였다. 경험주의적 사고는 과학의 발달에 큰 영향을 준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근대인들의 실존을 지배하였다. 이전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이 뜨였다. 타문화의 경험을 넓혀준 이동수단의 발달, 대중에게 성경의 보급과 문자 습득을 가능하게 했던 금속활자의 발명, 자연과학적 정보의 급속한 유통은 전통과 맹목적 신앙의 지위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젠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비교하고 분별하며, 판단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날선 갈등과 분쟁이 창궐하는 온갖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해줄 비법 역시 현대인의 마음과 상식에 관통하는 이성적인 범위 안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이성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에 대한 우려가 강조되곤 한다. 18세기 독일의 계몽주의자 칸트는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핵심요인이 이성의 잘못된 사용에 있다고 지적하며,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위하여 "이성비판"을 일종의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성이 자연과학적 이성과 도덕적 이성, 선험적 취미판단 기능으로 분류되는데 이것들을 오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 합리적 판단의 심판관이 될 자질은 이성을 보유한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바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자는 제한적이다. 배움과 숙련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배움의 출발점이 인간이 보유한 권한과 능력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의 명구 "너 자신을 알라"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이성의 권한과 능력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와 그 한계에 대한 각성과 자각의 필요성이다. 헤겔이 언급한 "이성의 간계(奸計)", "이성의 오용"을 벗어나는 길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능력의 배양에 있다.

이성의 기능 중에 자신을 돌아보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고난도의 숙련이 필요하다. 오늘날 세상의 온갖 불협화음은 칸트가 말한 이성의 기능별 사용법의 착각 때문이라기보다는 반성능력을 습득하지 못했거나 숙련 부족 때문일 것이다. 특히 자신의 한계와 과오를 되돌아볼 수 있는 눈은 단순한 학습이나 지적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삶에서, 우리에게 익숙해진 이성과 지식을 초월하는 제3의 가치에 대한 추구 안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실존적 각성과 영원을 추구하는 마음 안에서 반성적 힘이 배양되는 것이 아닐까?

임채광 교수 / 대전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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