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사람이야기

[ 인문학산책 ] 50

임채광 교수
2022년 03월 24일(목) 14:00
막스 셸러
새로운 학기를 시작할 때면 종종 소수의 학생들이 유사한 질문을 던진다. 가장 높은 빈도수의 질문은 '왜, 철학을 전공했냐?'는 것이다. 그럴 때 난 반사적으로 되묻는다. "철학이 무엇일까요?" 잠시 대화는 숨 고르기에 들어간다. 대부분의 경우 말문이 막힌 학생들에게 나는 다음 질문을 이어간다. "철학하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까요?"

"생각하는 것요?", "고민하기?", "토론하는 것요"등 학생들의 여러 가지 답변이 쏟아져 나온다. 이와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이어서 철학이 던지는 다양한 질문과 문제의 범위들을 주제로 관점이 연결된다. 이 때 내 답변에서 빠지지 않는 한 지점은 "철학적 주제나 관심은 우리의 삶에서 시작된다"는 내용이다. 삶의 의미와 가치 또는 인간의 삶 그 자체를 알고 싶고, 그러한 욕구를 해명해주는 일이 철학이 추구하는 가장 큰 과제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단지 철학자만의 일은 아니었다. 그 첫 번째 유형은 '신화적 세계관'이다. 종교와 구전 설화에 등장하는 인간은 때론 신의 반열에 오른 영웅으로 또는 반신반인의 추상적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 때 인간이 비현실적 상상의 인물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다. 둘째, 자연과학에서는 감각적 경험에 토대를 둔 인과율의 원리가 중시된다. 자연과학자들에게 인간은 물리적 경험대상이자 일종의 '동물'이다. 마지막으로 철학에 있어서 인간은 그 자체가 질문덩이다. 쉽게 예단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점은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의문의 대상"이자 "특수한 존재"였다는 점이다.

독일의 철학자 셸러(Max Scheler, 1874~1928)는 1928년에 발간한 책 '우주에 있어서 인간의 지위'(Die Stellung des Menschen im Kosmos)에서 철학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셸러에 의하면 철학은 인간의 특수하 지위를 해명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논리학이나 형이상학, 인식론, 미학 등 전통적 관심 영역과 차별화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철학적 논점들을 모두 포괄하는 새로운 인간학적 전환(Anthropologische Wendung)이 요청된다고 강조하였다. 이를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sche Anthropologie)"이라 불렀다. 이로서 철학은 관념에 머물러 있거나 이론 자체를 위한 연구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의 특징을 주제로 다룬다.

철학적 인간학은 셸러 이후로도 플레쓰너(Helmuth Plessner, 1892~1985)와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 게엘렌(Arnold Gehlen, 1904~1976)등이 연구의 계보를 이어 왔다. 이후 이들의 성과는 현대 다양한 개별학문과 연계되어 공동연구로 발전해 오고 있다. 이들의 기본적 시각은 첫째로, 인간을 형이상학이나 경직된 이론의 틀 안에 가두어 놓고 단정적으로 규정해 버리는 태도에 비판적이었다. 전통 형이상학이나 이성주의와 같은 관념적 사상들이 그 예이다. 철학적 인간학은 오히려 기존의 경직된 인간 이해의 틀을 벗고 유연하고 통합적인 시각을 표방한다.

둘째, 이들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의존하지 않았다. 다만 합리적이고 실증적 개별학문들을 연구 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주저하지 않았다. 플레스너와 게엘렌이 생물학 및 생리학 이론을 활용한 경우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철학적 인간학자들은 철학적 탐구를 일종의 "인간 존재의 규명을 위한 기초적 범주"라고 보고, 분석 과정에 "실증주의적"이고 "개방성의 원칙"을 견지하였다.

니이체(Friedrich Nietzsche)는 인간을 "아직 고정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동물(das noch nicht festgestellte Tier)"이라 불렀다. 완결된 존재가 아닌 "되어지는 과정(Werdung)", 그 자체가 부각되는 존재이다. 즉, 어떠한 한 두 가지 관점으로 섣불리 예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의 기질과 능력이 규정되고 확정된 존재가 아닌 모든 가능성이 열려져 있는 존재이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다양한 철학적 질문에 답변하고자 한다면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우선 해명해야만 한다.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존재론적 전제가 다양한 신학 이론을 양산했고, 인간을 생존을 위해 기능하는 생명기계로 이해했던 진화론이 현대인의 이기주의적 윤리관을 만들었듯이 말이다.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많은 일들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다양한 문제들과 잡음, 분란이 발생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오해 또는 삶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배후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문화나 사회, 제도적 환경이 우리의 관점을 편협하게 만들고 편견을 강화시키며, 왜곡된 삶의 토양 안에서 진리에 대한 갈급함을 느끼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철학적 인간학은 우리에게 나 자신에 매몰되지 말고, 열린 자세로 낯선 삶들에 대해 호기심으로 진지하게 접근할 것, 그리고 공감하고 이해하도록 안내할 것이다.

임채광 교수 / 대전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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