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 전도부인, 평양 여전도회의 창립자 이신행

[ 선교여성과 교회 ]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전도부인 ⑥

김은정 박사
2022년 03월 24일(목) 09:42
한국기독공보 2008년 4월 12일자에 게재된 '사진으로 보는 여전도회사' / 한국기독공보 디지털 아카이브.
평양여성경학교는 전국 단위로 학생을 모집했고, 여기서 배출된 전도부인들은 자신의 지역에 가서 사경회를 활성화하고 여성경학교를 세우는 기반을 닦았다. 이렇게 해서 북장로회 소속 모든 지부에는 1920년대까지 여성경학교가 빠짐없이 세워졌다. 심지어 남자성경학교보다 먼저 여성경학교가 건물을 마련한 경우가 많았다.

1920년대 교육받은 신여성의 수준이 성경학교 출신 전도부인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한 선교회와 장로회 총회는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여자고등성경학교를 평양과 원산에 개교할 것을 승인했다. 여자신학교라는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은 여성이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아직 용인하지 않는 당시 장로교회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감리회의 협성여자신학교가 높은 수준의 신학교육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장로회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지방 정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는 남성들을 두렵게 하는 '신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도 성서비평과 주석을 가르치고, 교회사와 조직신학 등 교회 전통을 비판적으로 볼 가능성이 있는 과목들을 가르쳤다.

# 장로교의 권사제도와 전도부인

장로교 전도부인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평양 여전도회의 창립자 이신행이다. 그는 평양에서 가장 먼저 개종한 여성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25년 동안 평양 여전도회의 지도자로 회의를 주관하고 전도 사업을 이끌었다. 1898년 2월에 자발적인 한국 기독교 여성의 모임으로 출발한 평양 여전도회는 널다리골(장대현)을 중심으로 다같이 모이는 평양의 기독교 부인 네 명이 회원이 되었다.

첫 여전도회 회원이었던 신반석은 무당 출신의 개종자로 장대현교회에서 1899년 여자조사로 임명되었다. 선교회가 고용한 전도부인이 아니라 교회가 임명한 전도부인으로서 신반석은 교회 여신도의 목회자로 일했다. 1000명이 넘게 모이는 장대현교회의 예배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장내를 정리하고, 성례주일이면 분병분잔하는 목사에게 세례교인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그는 여전도회에서 이신행을 보좌하는 부회장 역할을 하고, 순회사경회 강사로도 활동했으리라 추정된다. 이렇게 교회 안팎에서 여신도의 신앙생활을 돕는 여성 목회자로 전도부인을 서북 지역에서는 적어도 1910년경에 '권사'라고 부르는 용례가 나타난다. 1920년대에는 총회록에도 권사라는 비공식적인 직분이 언급되고, 교회 사기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권사는 여전도회의 지도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신행의 예를 보면, 1906년에 평양 중앙교회에 해당하는 제1교회 장대현교회에서 분립해나온 제4교회(후일 산정현교회)로 이명해서 1913년까지 권사로 일했다. 1908년 평양에는 모두 4개의 장로교회가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교회마다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연결해서 평양연합여전도회로 발전했다. 여선교사 세 명이 자문 역할을 맡고, 이신행이 회장이 되었다. 이렇게 발전한 여전도회는 부인사경회가 열릴 때 총회를 열고, 여기에 참석한 다른 지역 여성들에 의해서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941년 만국부인기도회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경의 신문기록을 보면 그 대개의 윤곽이 드러나는데 평양에는 무급권사와 유급권사, 명예권사들이 서로 협력해서 여전도회를 이끌고 있었고, 장대현교회의 유급권사로 임명된 김선경 같은 경우에는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재학 중에 교회의 부름을 받아서 장대현교회의 목회적 필요에 따라서 교회 각 기관에서 여신도들을 돌아보고, 연합여전도회 총무 역할을 하면서 모인 헌금을 만주, 산둥, 시베리아에 파송된 여선교사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권사는 교회 개척의 선두에 서서 전도 사업이 필요한 곳을 파악하고 회원들이 힘들게 모아서 낸 회비가 의미있게 사용될 수 있도록 사업 계획을 준비하고 실행했다. 해방 후 여장로청원운동이 서울에서 여전도회원들에 의해서 일어났을 때 장로회 총회는 타협안으로 권사 직분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권사 제도는 매우 불완전한 것으로 김선경처럼 여전도사와 같은 유급 권사의 지위를 반영하지 못했고, 여전도사들은 여전히 총회 차원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서리집사 정도의 권리(공동의회 참여, 1년 임시직) 정도만 보장받았다.



김은정 박사 /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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