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콧바람 선물

[ 시인의 눈으로 본 세상 ]

이재훈 시인
2022년 03월 09일(수) 10:00
겨울바다를 다녀왔다. C선배는 장편 희곡을 쓰기 위해 강원도 고성에 집필실을 마련하고 칩거 중이다. 선배는 답답해서인지 고성으로 놀러오라고 수차례 얘기했다.

"고성으로 건너와. 서울에서 2시간밖에 안 걸려. 여기 바다 좋아. 동해에서 최고야. 이럴 때일수록 콧바람도 좀 쐬고 해야지,"

선배는 마치 옆 동네에 놀러오라는 식으로 얘기했다. 고성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였다. 고성이 궁금해졌다.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콧바람도 좀 쐐야 한다는 말이 귀에 계속 맴돌았다. 며칠 후 가까운 선배 J교수와 함께 동해 바다의 최북단 고성으로 향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거진항이었다. 포구는 작고 고요했다. 포구에 고여 있는 바닷물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방파제를 지나 등대까지 천천히 걸었다. 고기잡이배들이 여러 척 정박해 있었다. 해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해변을 천천히 걸으며 동해를 오래 바라보았다. 거진항은 동해처럼 거칠고 웅장하고 깊지 않고 고즈넉했다. 우리는 아예 거진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거진수산시장까지 걸어갔다. 수산시장의 횟집에서 모듬회를 먹었다. 회맛은 말해 무엇하랴. 기가 막히다라는 말은 이때 쓰는 말이다.

다음날 아침에는 거진항 앞에서 군함을 오랫동안 보았다. 갑판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는 해군 장병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청간정(淸澗亭)으로 갔다. 관동팔경 중의 하나이며 송강 정철과 우암 송시열이 극찬했던 풍경을 지닌 곳이다. 우리는 저마다 역사적 지식을 늘어놓으며 정철의 시가 태어난 풍광을 눈속에 담았다. 설악의 골짜기에서부터 흘러온 청간천이 바다와 만나고, 기암절벽과 송림 속에 청간정이 있었다. 시를 한 편씩 써야겠다고 농담을 하며 풍경 속에 마음을 부렸다. 우리는 곧바로 청간정에서 대진항으로 향했다. 대진항은 동해에서 가장 끝자락에 위치한 포구이다. 대진항으로 향하는 해변도로의 경관은 아름다웠다. 옥빛으로 반짝이는 바다는 형언하기 힘든 색을 품었다. 아름다움 속에 쓸쓸함과 그리움을 함께 품은 듯했다.

대진항을 산책한 후 통일전망대로 향했다.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서 신고를 하고 전망대로 향했다. 코로나의 여파인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북한술과 기념품들을 파는 상점들도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해안은 절경이었다. 북으로는 금강산 자락인 낙타봉과 해금강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였다. 아름다운 산맥이었다. 북으로 향하는 동해선의 철로가 선명하게 보였다. 저 철로를 따라가면 북한이 지척이다. 통일전망대에서 내려오면서 DMZ박물관에 들렀다.

늦은 오후가 되자 동해안 최대 석호인 화진포로 향했다. 화진포의 호수는 꽝꽝 얼어 있었다. 철새들이 얼음 위에 앉아 늦은 햇살을 쬐고 있었다. 화진포에서 김일성 별장,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김일성 별장에서 바라보는 화진포와 해변 절경은 대단했다. 마지막 날 아침 C선배가 전화를 했다. 꼭 봐야하는데 못 본 곳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곧바로 4대 사찰 중 하나인 금강산 건봉사로 갔다.

선배의 말대로 제대로 콧바람을 쐬었다. 그동안 팬데믹으로 인한 잦은 유폐와 고립으로 마음이 황폐해져 있었다. 자연은 사람을 치유한다. 김남조 시인은 "나를 가르치는 건/언제나/시간……/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남은 날은/적지만//기도를 끝낸 다음/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겨울바다') 라고 노래했다. 지난 시간에 대한 성찰과 기도가 열리는 것은 바다가 주는 축복이다. 신경림 시인은 "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깊고 짙푸른 바다처럼/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동해바다')라고 반성한다. 겨울바다를 보고 오니 좀 더 너그러워진 것 같고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된 것 같다. 자연이 주는 선물을 듬뿍 받고 왔다. 자연과 마주한 바람내가 아직도 콧속에 쟁쟁하다.



이재훈 시인(건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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