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서훈 받는 3명의 선교사는?

한국 사랑한 푸른 눈의 선교사들...설립자 벨레 멘지스, 교장 마가렛 데이비스, 교사 데이지 호킹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22년 02월 25일(금) 13:26
#'호주 선교부의 어머니' 벨레 멘지스

벨레 멘지스(Belle Menzies·1856~1935)는 부산에서 1891년부터 1924년까지 선교했다. 멘지스 선교사는 '호주 선교부의 어머니' 혹은 '대모'로 불릴 정도로 호주 선교사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호주 빅토리아 주 여전도회연합회의 파송으로 1891년 10월 한국으로 온 그녀는 부산 동구 좌천동에 정착해 지역 선교, 여성 및 아동 교육, 구제 등의 일을 수행했다. 그녀는 고아들을 위한 사역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1893년 부산 지방 최초의 고아원인 미우라고아원을 시작했다. 미우라(Myoora)라는 말은 호주 원주민어로 안식처란 뜻이다.

1895년에는 한강 이남의 최초의 여학교인 일신여학교를 설립해 운영했다. 당시에는 여성에 대한 교육이 무시되거나 경시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성 교육이 중요함을 인식한 것. 일신여학교에서는 성경과 기독교 신앙을 주로 교수하였으나 수신(修身), 한글, 산수, 체조 등도 가르쳤다. 후일에는 고등과를 설치하였고, 고등과는 동래로 이전하여 동래일신학교로 불렸다. 한국을 떠난 멘지스는 호주 빅토리아 주 밸러랫의 가족들이 살던 다나가(Dana Street)의 옛 집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가, 1935년 9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숙부의 뜻을 이은 선교, 마가렛 데이비스

마가렛 데이비스(Margaret Davies)는 뿌리 깊은 장로교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나 빅토리아장로교회의 전통 안에서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다. 당시 선교계에서는 학생자원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는데 그녀는 멜버른대학교 재학 시절 캠퍼스 내에서 해외선교사로서 헌신할 자원자를 찾는 것을 보고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그녀는 멜버른대학교를 졸업하고 사범대에 진학하면서 전문인 여성선교사로서의 준비를 했다.

그녀의 숙부는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로 초기 한국 선교사였으나 한국에 오자마자 추운 날씨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여행을 한 끝에 천연두와 결핵에 걸려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오히려 호주장로교단의 헌신된 젊은 선교사들을 한국선교로 이끄는 촉매제가 되어 조카인 데이비스도 한국선교사로 자원했다.

데이비스는 한국에서 돌아온 후에도 한국의 여성이 교육을 갈망하고 있다고 홍보하고 선교사로 자원하는 후임 여성선교사를 위해 자비 50파운드를 기증하기도 했다.


#여성 교육에 앞장 선 데이지 호킹

데이지 호킹(Daisy Hocking)은 1916년 3월 초에 한국에 도착해서 부산으로 배치됐다. 이후 마산과 부산을 오가며 한국어 교사와 함께 비기독교 가정의 어린이들을 위해 일했으며 여성을 위한 지역사경회에서 교육을 맡기도 했다.

1923~31년 호킹은 부산진에 근거를 두고 여성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육하는 책임을 맡았다. 김해, 양산, 동래, 거창지역을 순회했고, 여성들을 위한 사경회를 조직하고 지도했고, 전도부인들을 감독했으며, 성경학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그녀는 주일학교들을 조직했고, 마을학교 교사들의 활동을 지도했고, 전반적으로는 여성들 사이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 여성들의 신앙지식과 신앙적 삶의 훈련이 성장하도록 도왔다.

1941년 일본이 전쟁에 돌입하게 되면서 호킹은 다른 여선교사들과 함께 철수 했다. 철수 후에도 한국의 프로그램들을 지원하기 위해 재정을 모으는 일을 계속했으며, 1971년 6월 10일에 사망했다.


표현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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