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은 영성을 넘어서지 않는다

[ 인문학산책 ] 48

김선욱 교수
2022년 02월 23일(수) 08:47
칸트가 생각할 수는 있으나 알 수는 없는 게 있다고 했을 때, 그는 지성의 영역과 영성의 영역을 구분했다. '순수이성비판'의 백미는 과학적 인식의 한계를 넘는 신앙의 영역이 존재하며, 그것에 대해 알 수는 없으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신앙의 영역을 과학적 태도로 다룰 때 이율배반에 빠진다. 논리적 관점에서는 유신론이나 무신론이 동등하게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했다. 선하지만 불행한 삶을 산 이들에게 내세에서라도 상을 주는 신의 존재가 '요청'된다며 신의 존재를 주장했다. 이렇게 요청된 신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라며 위르겐 몰트만은 칸트의 신관을 '희망의 신학'에서 비판했다. 몰트만의 비판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칸트의 태도에 깊은 공감을 느꼈다. 칸트가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영역에 대해 겸허하게 무릎 꿇고 가장 낮은 자세로 대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기에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입 닥치라는 말이었다. 속 시원한 선언이었으나, 결국 스스로 그 입장에서 물러섰다. 인식의 범위 밖에서 이루어지는 말과 삶을 인정하고, 새로운 철학을 후기 철학으로 정립했던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 서양철학의 선구자적 존재인 소크라테스의 경우를 보자. 그는 자신의 무지를 고백한 철학자이다. 단 한 권의 책도 남기지 않았던 그는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모두의 무지를 확인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 이론도 남기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으로 알려진 '이론'은 모두 그의 제자 플라톤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통념조차 파괴하는 끊임없는 질문으로 사람들의 반감과 오해를 샀기에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임을 당했다. 이에 위험을 느낀 플라톤은 스승의 형 집행 전에 타지로 도망했다가 한참 후에 아테네로 돌아와 학교를 차렸다. 처음에는 스승을 기억하여 글을 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을 소크라테스의 이름으로 주장했다. 소크라테스는 이론 속에 감춰진 독단을 파괴한 사람이다. 끊임없이 합리적 설명을 요구했고,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신과 비논리는 철저히 거부했다.

소크라테스는 회의주의와 상대주의도 논박했다. 당시 그와 대척점에 서 있었던 소피스트들이 회의주의자요 상대주의자였다. 소피스트들도 모든 것을 회의적으로나 상대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자신의 주장만큼은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니 말이다.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는 애초에 자기모순에 빠진 이론이다. 회의주의 자체는 회의적으로 보지 않으니 말이다. 회의와 상대론에 입각해서는 인간의 삶은 불가능하다. 시간과 공간의 매트릭스 속에 자리 잡은 우리의 몸과 실존은 '단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방법을 '산파술'이라고 한다. 산부인과서 출산을 돕는 의술과 같다는 말이다. 출산된 아이는 모두의 아이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이이다. 이처럼 자기 생각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성을 갖는다는 주장에 독단이 있다. 내 생각은 나의 상황에서 최선이므로 나의 삶에 충분한 타당성을 갖는다. 이런 생각을 다른 사람과 나누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지혜와 원리를 발견해 가는 것이 철학의 일이라는 게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이다.

위대한 사상가의 철학에서 우리는 지적 겸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때때로 영성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듯 보이는 사상가도 실상은 지적 전선의 전위에서 현실과 투쟁하고 있는 전사들이다. 오만해 보이는 그들도 겸손한 영성의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헤겔, 마르크스와 니체, 비트겐슈타인과 포스트모더니스트 사상가 등 복음적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는 이들이 다 그렇다. 물론, 영성이 중심에 있어야 이성이 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영성의 사람들이 지적 전위에 선 이들의 전쟁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지적 태만일 수 있다.

영성의 사람은 치열한 지성의 노동을 정교한 겸손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한다. 나로서는 주제넘은 말이지만, 이성이 제대로 형성되어야 영성이 순도 있게 깊어지는 것이 아닐까.

김선욱 교수 / 숭실대 학사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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