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출간된 '텬로력뎡' 속의 삽화들

[ 이야기박물관 ]

신상현 목사
2022년 02월 16일(수) 14:00
기산(箕山) 김준근의 천로역정 삽화 '십자가앞의 기독도'.
김준근의 천로역정 삽화 '성령의 불을 끄려는 사탄과 성령의 불을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부으시는 예수님' .
신앙고백으로서의 미술 작품은 우리에게 풍부한 영감과 은혜의 통로가 된다. 루터의 성서 삽화 이래로 개신교 미술에서 삽화는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우리에게 친근한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천로역정'도 그러하다. 1680년 간행된 제4판부터 삽화가 수록되기 시작했고, 이후 3세기를 지나며 여러 나라의 유명 화가들이 '천로역정'의 삽화를 그렸다.

1895년 우리나라에서 선교사 깁슨(Harriet E. Gibson, 1860~1908))과 게일(James S. Gale, 1863~1937) 그리고 게일의 한국어 교사였던 이창직(李昌稙, 1866∼1936)에 의해 번역 출간된 '텬로력뎡'에도 김준근의 삽화 42점이 수록돼 있다. 우리나라 개신교 미술의 시작이었다. 기산(箕山) 김준근은 개항장이었던 원산, 초량, 제물포 등에서 풍속화를 그렸고, 공방을 차려 대량 생산한 작품들을 해외로 1500점 이상 팔았다. 게일 선교사는 이런 김준근에게 '텬로력뎡'의 삽화를 부탁했고, 그림은 다시 목판으로 판각됐다.

김준근은 1860년대 출간된 로버트 매과이어(Robert Maguire, 1826~1890)목사의 주석본 '천로역정'을 참고했다. 이 책에는 셀로스(H. C. Selous, 1811~1890)와 프리올로(M. Paolo Priolo, 1818~1892)의 삽화가 실렸는데, 17세기 영국 사람들의 복식과 문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김준근의 삽화들을 셀루스와 프리올로의 것과 비교하면 대부분 구도와 등장인물의 표정이 동일하거나 유사하다. 그러나 김준근은 서양본 삽화의 구도는 참고하되 우리 전통회화 기법과 문화에 충실했다. 그는 삽화의 화제(畵題)를 그림 위 공간에 적어 두어 우리나라 문인화의 전통을 따랐고 등장인물의 복식 역시 우리 것으로 돼 있다. 예수님은 갓을 쓴 한국 사람으로, '기독도(Christian)'에게 흰옷을 입혀주는 천사들은 부용관에 단령포를 입고 목에 표대를 휘날리는 선녀로 등장한다. 특히 기독도의 복식은 저고리에 짚신을 신은 상민의 것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이야기 전개에 따라 역경을 극복하며 천국에 가까이 갈수록 높은 신분의 복식으로 변화된다. 이는 김준근이 책의 내용을 숙지하고 기독도의 신앙성숙을 신분의 상승으로 비유해 표현했음을 알려준다. 신앙성숙의 여정으로서의 인생길 이야기 '천로역정'을 42점 삽화만으로도 충분하게 구현해낸 것이었다.

한국인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서기 위한 재해석과 토착화의 노력으로 '텬로력뎡'은 명실공히 개항기 개신교 최고의 전도문서로 쓰임 받았다. 다시금 이 책을 펼쳐보며 필자는 지금 천로역정 신앙여정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는가 궁금하다.

신상현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역사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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