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이신행 권사와 아들 이덕환 장로 가족

[ 이야기박물관 ]

신상현 목사
2022년 01월 27일(목) 15:45
처음 여전도회를 조직한 이신행 권사(앞열 가운데)와 아들 이덕환 장로(뒷열 우측) 부부.
다음 세대로의 신앙 계승이 교회의 고민이 된 요즘, 크리스찬 대가족이 모인 설날 풍경이 궁금하다. 모양은 제각각이겠지만 신앙인이라면 대대손손 하나님만 섬기며 그 은총 가운데 살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하나일 것이다.

이 사진은 1915년 평양의 겨울을 살았던 한 가족의 모습이다. 두건부터 모피 안감이 두툼한 마고자와 치마까지 흰색으로 치장한 할머니는 두 손자의 손을 꼭 붙잡고 앉아서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바로 최초로 여전도회를 조직한 이신행 권사다. 이신행은 아들 이덕환이 16세 때 전해준 전도문서로 복음을 접했고, 마포삼열 선교사를 찾아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마포삼열 선교사가 세례를 행한 평양의 첫번째 여성이기도 했다. 그녀가 만난 복음은 우상숭배와 체념 속에 살던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사명으로 그녀를 초청했다. 이신행은 1898년 장대현교회에서 신반석, 박관선 등 63명과 여전도회를 조직해 25년 간 회장으로 섬긴다. 하나님은 여전도회를 통해 당시 가부장제 관습에 갇혀있던 여성들을 돌보셨다. 복음을 전파하는 여성들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았지만, 전국 각 처를 돌며 열심히 성경과 전도문서를 전파했다. 그들은 1898년부터 사경회의 '여자성경반'에 참여해 교육을 받았고, '전도부인'으로 불렸다.

모전자전(母傳子傳)이랄까, 이신행 권사의 아들 이덕환 장로 역시 그 어머니처럼 시대의 아픔을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냈다. 사진 오른쪽에 양복을 잘 차려입고 서 있는 30대의 이덕환 장로는 당시 평양의 자본가였다. 객주업과 잡화, 무역상으로 부를 축적했던 그는 그리스도인 민족주의자 경제인이라 불릴만했다. 이덕환은 1908년부터 항일비밀결사 신민회의 일원으로서 이승훈과 함께 평양 자기제조 주식회사와 태극서관을 경영했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한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민족운동에 참여함과 동시에 항일정신을 가지고 민족자본을 지키기 위한 사업을 병행했다. 3.1운동 당시엔 불온문서 배포 혐의로 체포됐고, 1920년 봄에는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낸 사건으로 고초를 겪으면서도 물산장려운동을 이끌며 조선인 상공업계를 대표했다.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은 이야기지만, 그 시절 평양에 살았던 이 사진 속의 가족들은 지금도 크리스찬 명문가를 이루고 싶어하는 우리 모두에게 아름다운 귀감이 된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면, 역사는 그 모습을 기억하고 기꺼이 계승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상현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역사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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