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프-후스-루터에게 이어진 종교개혁의 불꽃

[ 선교여성과 교회 ] 종교개혁의 유산,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④

박경수 교수
2022년 01월 26일(수) 10:57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제75회 72연합회 회장협의회에서 강의를 듣는 지연합회장의 모습. / 한국기독공보 DB
14세기 잉글랜드 옥스퍼드의 교수였던 존 위클리프는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를 철저히 비판하면서 성경에 기초한 개혁을 요구했다. 위클리프는 성직자의 특권적 지위와 사치와 허식을 맹렬하게 공격했고, 교황권을 정점으로 하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위계적 정치구조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수도원제도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화체설, 연옥, 성직자 독신과 같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와 미사를 비롯한 로마교회의 예식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비판했다. 이 같은 위클리프의 비판은 언제나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했다. 위클리프는 과연 '종교개혁의 새벽별'(Morning Star of the Reformation)이라고 불릴 만한 개혁자였다.

발도파와 마찬가지로 위클리프와 그의 동료들도 중세의 라틴어 성경을 누구든지 읽을 수 있도록 영어로 번역해 출판했다. 이것을 우리는 '위클리프 성경'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세계의 모든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전하려고 노력하는 선교회를 '위클리프성경번역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s)라고 부르고 있다. 위클리프는 특별히 체코의 개혁자 후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랬기 때문에 로마가톨릭교회가 콘스탄츠공의회에서 1415년 후스를 화형에 처할 때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정죄했고, 이후 1428년에 오래 전 죽은 위클리프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유해를 다시 화형시키고 그 재를 그가 목회했던 루터워스 근처의 스위프트 강에 뿌렸던 것이다. 지금도 잉글랜드의 옥스퍼드와 루터워스를 방문하면 위클리프의 발자취를 만날 수 있으며, 작은 도시 아머샴에서는 위클리프를 추종했던 롤라드(Lollards)를 기념하는 박물관과 기념비를 방문할 수 있다.

루터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체코의 교회개혁자 얀 후스였다.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자 에크와 논쟁하면서 "우리 모두는 후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자신이 후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았음을 천명했다. 후스는 위클리프와 마찬가지로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예식을 비판하면서 성경이 모든 것 위에 있는 최종적 권위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프라하대학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베들레헴채플에서 자신의 개혁사상을 과감하게 선포했다. 특히 후스는 발도와 위클리프를 이어서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하였고 설교도 체코어로 했다. 이것은 라틴어 성경과 라틴어 미사만을 고집하던 로마교회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었다. 또한 성만찬에서 빵만 주던 로마교회의 예전을 거부하고 성경의 예를 따라 빵과 함께 포도주도 성도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로마교회의 권위에 도전했다. 결국 후스는 1411년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됐다.

마침내 로마가톨릭교회는 1414년 콘스탄츠에서 교회회의를 열고 후스를 소환했다. 후스는 신변안전을 약속 받고 콘스탄츠로 갔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는 심문을 받고 이단으로 정죄되어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해졌다. 후스는 죽었지만 그가 보여준 진리에 대한 열망, 실천하는 신앙의 용기는 루터에게로 이어져 다시 살아나 종교개혁의 불꽃이 됐다.



박경수 교수 / 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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