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년에 또 할지도 모르는 김장의 기록

[ 시인의 세상보기 ]

이재훈 시인
2021년 12월 08일(수) 10:00
"동생들아. 어머니가 텃밭에 또 배추를 심으셨다. 작년부터 그렇게 심지마라고 했는데 또 심으셨네. 내년엔 절대 안 심는다고 약속하셨다. 어쩌겠냐. 김장해야지. 돌아오는 주말에 김장하니까 시간 비워두고 모두 참석하도록."

지난주 가족 단톡방에 올린 문자다. 부모님은 퇴직 후 친구들과 함께 작은 텃밭을 일구신다. 100여 평의 땅을 서로 나누어 고구마, 방울토마토. 옥수수, 양파, 무우, 호박, 고추, 배추 등속을 절기에 맞춰 심고 뽑고 또 심는다. 텃밭에는 농가주택 콘테이너도 있어서 거기에 모여 밥도 해먹고 커피도 마시고 재밌는 시간을 보내신다. 말하자면 텃밭은 부모님 친구들의 아지트이자 땀 흘리는 일터이며 가족들의 식재료를 공급하는 로컬시장이다. 올해에도 어머니는 텃밭에 배추를 심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배추를 심었다. 늘 올해까지만 김장하고 힘들어 안 하신다고 하셨지만 어김없이 김장을 했다.

동생 부부와 토요일에 모였다. 배추를 뽑고, 외발손수레로 옮기고, 빨간 고무다라이에 천일염을 풀고, 배추를 푹 절인다. 와 속이 꽉 찼네. 씨알이 참 굵다. 배추가 참 달다. 배추농사가 정말 잘 되었네. 부모님의 친구들이 한 마디씩 거들며 도와주신다. 웃음꽃이 핀다. 어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김장은 어머니의 아픈 허리와 무릎을 잊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다행히 날씨도 따뜻했다. 온몸이 쑤시지만 기분은 너무 좋다. 다음날 아침 텃밭에 밤새 절여놓은 배추를 차로 옮겼다. 어머니는 김치속 양념을 이미 다 만들어 놓으셨다. 아파트 거실에 삼형제 가족들이 모두 모여 배추에 속을 버무린다. 주방에서는 수육을 삶고 아이들도 돕겠다고 앞치마를 두른다. 김장을 다하고 각자의 차에 김치를 싣고 모여 앉아 저녁을 먹고 있자니 한 해의 가장 큰 일을 해낸 것만 같다.

김치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김장문화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 in the Republic of Korea'라고 한다. 즉 함께 김치를 담그고, 김치는 나누는 문화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우리의 김치는 나눔의 문화다. 김장김치처럼 주변에 많이 나누는 음식도 없을 것이다. 김장을 하면 가족 형제들 이웃들에게 나눈다. 김장은 또한 사람들을 한데 불러 모은다. 김장은 혼자 할 수 없다. 김치를 혼자 담글 수는 있지만 김장을 혼자 하지는 못한다. 아주 작은 일손이라도 필요하다. 김장은 겨울을 지나고 봄이 올 때까지 비타민을 공급하고 우리의 밥상을 책임지는 지혜에서 나왔다. 김장문화는 함께 모이고, 나누고, 오래 묵히는 철학을 가진 문화이다.

김장은 고려말 한시에도 등장하리만큼 오래된 음식문화이다. 권근은 "시월 되니 바람 거세고 새벽엔 서리가 네리네/울 안에 가꾼 채소 다 거두어 들였네/맛있게 김장하여 겨울에 대비하니/진수성찬 없어도 입맛 절로 돋우네"라고 노래했다. '축채(蓄菜)'라는 제목의 한시이다. 축채는 채소를 비축한다는 뜻으로 김장을 의미한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김장을 하여 채소가 귀한 겨울을 대비했다. 정일근 시인은 "어머니에게 겨울 배추는 詩다/어린 모종에서 시작해/한 포기 배추가 완성될 때까지/손 쉬지 않는 저 끝없는 퇴고/노란 속 꽉 찬 배추를 완성하기 위해/손등이 갈라지는 노역의 시간이 있었기에/어머니의 배추는 이 겨울 빛나는 어머니의 詩가 되었다"('어머니의 배추')라고 노래했다. 시인은 배추를 키우는 어머니의 손을 시를 쓰는 손에 비유한다. 어머니가 키운 배추와 시가 어우러지니 가장 감동적인 풍경이 되었다.

김장김치를 집으로 가져와 다른 특별한 찬 없이 며칠을 맛있게 먹었다. 김치로 인해 올겨울이 든든해졌다. 맛있게 먹다보니 문득 내년에도 김장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다들 힘들다 하면서도 형제들이 부모님 댁에 함께 모여 김치를 담그고 음식을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는 시간은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어머니도 김장김치를 드시며 흐뭇한 표정으로 내년에도 김장을 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셨는지 모를 일이다.



이재훈 시인/ 건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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