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 수는 있으나 알 수는 없는 것

[ 인문학산책 ] 38

김선욱 교수
2021년 12월 07일(화) 08:05
임마누엘 칸트는 여러 면에서 다른 철학자들과는 다르다. 첫째, 그는 철학이 직업이 될 수 있도록 전문화했다. 그의 철학은 배워야 이해할 수 있고 혼자 책을 읽어서 터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둘째, 그의 철학은 대중의 삶에까지 영향력을 주었다. 독일어권 대중들에게는 "칸트가 이르기를~"이라는 말이 도덕성을 일깨우는 말이었다. 셋째, 그의 철학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를 명확하게 해 준다. 그래서 "나는 칸트주의자다"라는 말이 "나는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칸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순수이성비판'이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세상을 보는 관점의 전환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한 이다. 당시 종교적 신념과 결부되었던 천동설은 '지구 중심적 사고'였고 지동설은 '태양 중심적 사고'였다. 지구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고귀한 인간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터전이며 태양은 한갓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땅이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생각은 불경한 것이었다. 과학의 이름으로 이런 생각을 뒤집은 것이 코페르니쿠스였다.

지식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칸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경험할 때 지식이 형성된다는 상식을 뒤엎고, 우리의 인식구조에 의해 지식이 형성된다고 했다. 빨간색 렌즈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통 빨갛게 보인다. 모든 인간이 빨간 렌즈를 끼고 있다면 세상이 빨갛지 않다는 것을 알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개는 흑백으로만 세상을 본다고 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개는 흑백 렌즈를 낀 것이다.

칸트가 말한 인간의 인식구조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 세상을 경험하는 가장 기본적 틀은 시간과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이 세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시간 인식과 공간 인식의 틀이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나아가 사물을 식별할 때 크고 작음, 있고 없음, 단순과 복합 등으로 접근하는 것도 모두 인간에게 내장된 인식구조에 따른 것이다. 우리가 글을 입력할 때 '한글'로 입력하는가 'Word'로 입력하는가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는 것처럼, 인간 인식의 틀로 인해 우리가 세상을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방식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의 틀에 따라 가공되기 이전의 세상, 즉 사물 자체는 어떤 모습일까? 과연 그것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칸트의 답을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내가 빨간 렌즈를 끼고 있는 한 렌즈 밖의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 그런데 그 렌즈를 우리는 결코 벗을 수 없다. 따라서 사물 자체가 원래 어떤 것인지를 결코 알 수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가 그것, 즉 사물 자체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생각할 수는 있다. 이 또한 칸트의 지적이다.

인식과 생각은 다르다. 지식과 사유는 다르다. 전자는 우리를 과학의 세계로 인도하고, 후자는 의미의 세계로 인도한다. 전자는 같음에 근거하고 후자는 다름에 근거한다. 모든 인간이 동일하다는 전제로 현실에 접근하는 것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현실에 접근하는 것은 다르다. 모두가 동일하다는 전제에서는 차이는 인정되지 못하고 차별로 이어진다.

칸트의 관심사는 모두에게 동일한 인간의 인식 구조가 어떠한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칸트는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후에 도덕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에 대한 탐구로 나아갔다. 도덕도 같음을 근거로 접근한다. 모든 인간은 논리적이며 선의지를 갖고 있다는 전제로 말이다. 예술을 다루는 '판단력 비판'에 와서야 비로소 칸트는 다름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방법을 논한다.

나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내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에 대해서는 무지를 인정해야 한다. 이런 인정에서 대화의 윤리가 나온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할 때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겸손해야 한다. 내가 옳다는 생각을 멈추고 상대의 말을 듣고 이해하려 해야 한다. 알지 못하는 타자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김선욱 교수 / 숭실대학교 학사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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