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언어의 작용이다

[ 인문학산책 ] 36

김선욱 교수
2021년 11월 24일(수) 10:03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언어란 무엇인가? 언어란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라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이런 관점을 도구적 언어관이라고 한다. 만일 이 관점이 옳다면, 말하는 자는 먼저 의사를 형성하고 이를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전달해야 하며, 듣는 자는 그 의사를 화자의 언어에서 분리해 내어 파악해야 한다. 또 그 의사는 성격상 도구인 언어와는 다른 어떤 것이어야 한다. 정말 그런가?

철학적 해석학의 길을 열었던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는 이러한 도구적 언어관이 언어와 세계 그리고 사유의 관계를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 잘못된 언어관이라고 비판한다. 의사,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사유는 언어와 분리되어 형성될 수 없다. 생각은 언어로 형성된다. 말을 통해 전달되는 의사도 언어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생각은 마치 언어를 벽돌로 하는 벽돌집과 같은 것이다. 벽돌 없이 벽돌집이 없는 것처럼, 언어 없이 생각은 존재할 수 없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도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무엇을 경험할 때 경험 대상을 우리의 생각 속으로 가져온다. 이때 생각은 경험 대상에 적합한 단어를 찾는다. 언어는 이렇게 우리의 경험을 매개한다. 이런 과정을 가리켜 가다머는 "사물이 언어로 된다"고 표현한다. 생각 속에서 우리는 경험에 적합한 언어를 찾고, 숙고하는 가운데 다시 언어가 작용한다.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언어다.

경험은 언어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기존의 지식이 타당한지를 확인하고 또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가 옳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한다. 또 기존 지식을 허물거나 기대에 어긋나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새로운 경험은 기존 지식에 대한 교정 역할을 하거나 지식의 내용을 확대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은 언어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언어는 끊임없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있으며,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가다머는 "어떠한 언어도 무한하다"고 말한다.

언어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인간이 자의적으로 처분하거나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언어와 같은 기호 체계를 논리적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지만 이는 진정한 의미의 언어는 아니다. 언어란 역사를 통해서 형성되어온 것이며,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다. 일상언어가 진짜 언어이다. 언어는 개인의 창작물이나 다수의 사람이 합의를 통해 임의로 형성한 산물이 아니며, 공동체가 역사를 통해 일구어낸 근원적 성격의 합의를 통해 형성해 낸 것이다. 그래서 언어에는 이미 공동체성이 내재한다. 언어 학습과 성장 과정을 동시에 갖게 되는 인간에게는 공동체성이 이렇게 근원적으로 장착된다.

사유가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유를 구성한다. 또, 언어는 공동체의 전승물이다. 이 둘을 잇대어 생각해 보면, 인간이 완전한 중립의 공간에 서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은 이미 언어에 의해 제약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인간의 정신은 그런 제약을 되돌아보는 반성 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대화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대화를 이끌고 간다고 믿지만, 실상은 언어가 대화를 이끌어 간다. 대화 가운데서 우리의 의사가 오고 가는 것 같지만, 실은 말이 말을 불러일으킨다. 대화는 한쪽의 말이 다른 쪽의 말을 이끌어 가는 작용을 기초로 이루어진다. 대화 가운데 하나의 지식이 갑자기 돌출할 수 있다. 대화의 결과로 어떤 것이 나타날 지는 사전에 아무도 모른다. 대화에 참여한 자가 대화의 결과에 대해 놀랍게 여기는 경우들이 많다. 이러한 대화를 이끄는 것은 언어이며, 인간 주체는 수동적으로 이 대화에서 기능할 뿐이다. 이런 대화를 개인의 머릿속에서 진행할 때 창의력이 샘솟는다.

현대 철학은 각별히 언어에 주목한다. 말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 대화 속에서의 역할, 그리고 생각 속에서 하는 작용을 곱씹을수록, "태초에 말씀이 있다"는 말씀의 의미가 심오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김선욱 교수 / 숭실대학교·학사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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