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에 관한 생각

[ 오피니언 ]

이홍술 목사
2021년 09월 29일(수) 10:07
요 몇 년 사이에 우리는 동성애에 관한 주제로 의견이 나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아마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도전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동성애를 용납하는 경향이 있고 또 용납하려는 움직임들이 많다. 이렇게 기독교의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은 많은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하지만 우리가 부정할지라도 세상의 여러 부분이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주소다.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지만 현실화한 사안들을 기억해야

우리는 먼저 주 5일 근무가 성경의 가르침인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성경은 엄연히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하루를 쉬라고 하였다. 이것은 다름 아닌 십계명 가운데 하나이다. 십계명은 성경의 모든 내용 가운에 하나님께서 직접 새겨주신 유일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교회는 십계명 중의 하나인 제4계명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주 5일 근무가 시작될 때 몇몇 교회들이 저항하는 듯했지만, 이내 무너져 내리고 오히려 주 5일 근무에 대비하여 교회 체계를 바꾸기도 하지 않았는가? 아니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노동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여 제4계명을 에둘러 해석하려고 하기도 했다. 세상의 물결이 치고 들어오니 교회가 그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간통죄 폐지, 낙태죄 폐지 등도 교회는 반대했고 지금도 반대하고 있지만, 세상은 이 두 사안에 대해 폐지 방향으로 흘렀다. 헌법재판소가 간통죄와 낙태죄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부정하지만, 세상이 긍정한 것이다.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동성애의 문제도 교회가 반대하지만, 세상은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우려하며 이 문제를 미리 대비하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동성애와 동성애자에 대해 다르게 접근해야

동성애가 곧 동성애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성경을 읽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동성애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부합하지 않다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부합하지 않다는 생각은 그 문제를 죄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서 죄로 인식하는 동성애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동성애자의 문제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교회가 동성애는 죄로 간주하고 동성애를 금하지만, 현실 안에 동성애자가 등장했을 때 교회는 이들을 정죄와 심판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이들도 구원의 대상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 죄와 죄를 행한 자는 구별해야 한다. 교회는 죄를 행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죄를 범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전한다. 가령 살인이 죄이기 때문에 교회는 살인을 금하지만 누군가가 살인을 저지르고 투옥되었을 때 교도소로 찾아가 그들에게 전도하여 그들이 교회로 돌아오도록 인도한다. 어떤 경우는 그런 무서운 죄를 저지른 사람인데도 강단에 세워 간증하게 하는 예도 있다. 죄 자체는 미워하지만, 죄를 범한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창기들도 사랑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 행위가 곧 예수님은 창기로 사는 것을 옳다고 인정하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창기의 삶은 죄이기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전에 하던 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신 것이다. 죄에는 차별을 두지 않아야 한다. 살인자는 용납하고 동성애자는 거부한다는 논리는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살인이 죄이지만 살인자를 용납하듯이, 동성애를 죄로 규정할진대, 동성애자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대하여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

구원의 대상과 공동체 수용의 문제는 신중하게 고려해야

동성애자가 구원의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교회공동체 안에 수용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문화적인 괴리감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전에는 남성 우월을 강조하기 위해 동성애를 높이 평가하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는 이성애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준비가 되지도 않는 상태에서 동성애자들이 교회공동체에 들어오게 된다면 상당히 당황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현대의 몇몇 교회들은 반려동물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그들을 수용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하려고 하는 교회들도 있음을 안다. 심지어 반려동물의 세례 문제까지도 고민해야 하는 실정이다. 현대사회가 이런 시대이지만 동성애자들의 공동체 수용의 문제는 반대가 심각 그 이상이다. 동성애는 죄이지만 동성애자는 구원의 대상임을 알면서도 그들의 공동체 수용의 문제가 쉽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정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사랑하여 그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사역자를 키워 먼저 동성애자들을 위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본다.

신학대학이 교단의 정체성은 유지하되 사고의 지평은 넓혀가도록 허용해야

지금 우리는 장신대가 마치 동성애를 옹호하고 찬양하는 대학처럼 선동되는 유인물과 몇몇 매체의 글들을 접하고 있다. 총회가 가까워지면서 그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엔 장신대 교수들이나 학생들이 동성애 자체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굳이 말해본다면 동성애가 아닌 동성애자들의 구원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놓고 고민하는 것이라고 본다. 교회가 못하는 부분을 신학대학에서 깊이 있게 고민하며 교회에 대안을 마련해 주려는 의도라고 본다. 물론 이 문제도 교수들이 일선에 나서서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뜻이 있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행위로 알고 있다. 신학대학은 여러 학문적 주제들을 위해 열어두어야 하며 자유롭게 토론하고 다양하게 생각하는 자들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교회사를 보면 획일적인 것에 집착했던 신학 전통 아래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정죄 되고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지 않았던가? 특정 생각이 바른 것이고 열린 생각은 틀린 것이라는 논리는 옳지 않다고 본다. 바라기는 신학대학에서 동성애에 대한 문제도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도록 열어두어 동성애자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역자도 배출하였으면 한다.

이홍술 목사 / 평화로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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