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의 문제: 쿠자누스 대 벵크

[ 인문학산책 ] 32

안윤기 교수
2021년 09월 21일(화) 16:16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는 '중세의 가을'이라 불리는 15세기 사상계에 가장 인상적인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독일 출신이지만 일찌감치 이탈리아 파도바로 유학 가서 교회법, 자연과학, 철학을 공부했고, 1430년에 독일로 돌아와 사제에 서품된다. 당시 도처에서 공의회 운동이 일어나 교황권이 크게 흔들렸는데, 그는 도리어 교황파에 가담해 혼란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리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통합을 위한 외교사절로 일하기도 했는데, 그때 그가 외친 구호가 "예전의 차이는 있어도 하나의 종교"(una religio in rituum diversitate)였다. '차이'보다 '일치'에 방점을 찍는 신념을 보여주는 구호가 아닐 수 없다. 동서 교회의 통합 협상을 위해 그리스에 갔다가 돌아오는 배 위에서 그는 "유식한 무지"(docta ignorantia) 개념을 착상하고, 같은 제목의 저서를 1440년에 출간했다. 이 책은 "서로 모순관계인 두 항이 실재에 있어서는 합치한다"(coincidentia oppositorum)는 파격적인 생각을 담고 있으며, 이후 그가 평생 간직한 중심사상이 되었다.

이미 '유식한 무지'(De docta ignorantia)라는 책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상반되는 두 가지 단어("유식" 대 "무지")를 나란히 붙이는 일은 황당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모순율'이라는 이름으로 무릇 학문이 반드시 준수해야 할 철칙이 있다고 여겨졌는데, 바로 그 원칙을 쿠자누스는 어긴 것이다. "작은 거인" 같은 말은 예술적 표현은 될지언정, 사태의 진리를 논하는 학문 영역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철수는 결혼한 총각이다" 같은 문장은 우리가 철수를 조사할 것도 없이 무조건 거짓말이다. 모순율을 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자누스는 모순율의 타당성을 '지성'(ratio)을 사용한 저차원적 인식에만 국한시키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는 모순율을 넘어선 존재의 진리, 곧 '상반된 것의 합치'가 있어서, 바로 그것을 '이성'(intellectus)을 통해 직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성을 통한 고차원적 실재 파악이라 해도 이 지식 또한 무지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계 만물을 알려 하는데, 쿠자누스에 따르면 만유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응축'(complicatio) 형태인 하나님에게서 '전개'(explicatio)되어 나온 것이므로, 결국 하나님을 알아야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무지'를 인정해야 하나, 이것은 막연히 지적 노력을 포기하자는 뜻에서의 불가지론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무한성과 초월성에 다가가는 데서 드러나는 무식이다. 마치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더욱 우리의 죄인됨이 선명해지지만, 그래도 은혜를 바라며 계속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듯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쿠자누스는 '유식한 무지'를 역설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이델베르크 총장이었던 요한네스 벵크(Johannes Wenck, 1396~1460)는 '알려지지 않은 글'(De ignota litteratura, 1442)을 써서 쿠자누스를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쿠자누스의 말을 따르면 결국 하나님과 피조 세계의 차이가 희미해져서, (후대에 '범신론'이라 불릴) 이단 사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또 성부, 성자, 성령의 차이가 없어져서 '삼위일체론'이 파괴되고, 성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은 '성육신'의 기적도 사라져 버린다고 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그의 주장은 문제가 심각하여,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원칙을 유린하여 그 결과 '신앙과 학문을 철저히 파괴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무지'를 내세우는 쿠자누스에 맞서서 벵크는 '지식'을 수호하려 했다. 그가 생각하는 지식은 무수히 다양한 현상을 일정한 범주에 맞춰 구분하고 정리하는 데서 성립한다. 개별자를 유와 종에 따라 분류하는 법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시했는데, 이에 따르면 인식 대상의 특성과 질서가 선명해진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분류에 포섭되지 않는 개체의 구체적 차이점은 그저 '비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무시된다는 문제가 있다. 개를 진돗개, 삽살개, 도사견 등으로 크게 분류하면 그만이지, 굳이 우리 집 강아지 '점박이'가 가진 구체적 특징, 즉 털의 숫자와 길이까지 다 헤아리려면 그 지식의 양은 무한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그냥 제외시켜 버리자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쿠자누스의 시선은 향하고 있었다. 그는 '유식한 무지 변호'(Apologia doctae ignorantiae, 1449)를 써서 벵크의 비판에 답변하였다. 진리는 실재를 파악하는 것인데, 개체성을 배제하고서 과연 참된 지식을 말할 수 있을까? 도리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는 참새 한 마리도 그냥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고, 머리털 하나도 다 세신 바 되었으니, 하나님의 절대적 보편성은 절대적 개별성과 일치한다. '절대'(絶對, absoluta)란 '대립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서로 대립하는 두 항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모순율이 마치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세상을 반쪽만 본 것이요, 온전한 실재는 이 모든 대립을 벗어나 통합된 무한자 안에 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만유와 다르지 않다"(non-aliud)는 특징을 통해 만유와 구별된 분이시라는 과감한 주장을 쿠자누스는 펼친다.

이런 통찰은 그저 비교와 비례 관계에 주목하는 지성의 견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풍요로운 존재 세계를 딱딱한 유와 종의 범주를 통해 분류하려 드는 지성의 견지에서 볼 때, 절대자는 '알 수 없는 분'이시고, 지성은 도리어 그 앞에서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이성은 만유 안에서 만유를 통일하는 무한한 절대자를 직관한다. '유식한 무지'라는 이런 놀라운 통찰을 쿠자누스는 설명하려 했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통합과 각처의 분쟁 조정을 통해 실행하려 했다.

안윤기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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