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론 문제: 오컴 대 러트렐

[ 인문학산책 ] 30

안윤기 교수
2021년 09월 08일(수) 17:17
오컴.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1285~1349)은 시대의 풍운아였다.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이면서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는데, 예리한 매스로 해부하듯 고전을 해석하던 그의 논변 앞에 토마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 둔스 스코투스 같은 중세 최고의 권위도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기존 이론을 모두 '옛것'(antiqui)이라 부르며 '새것'(moderni)과 대조해 결국 붕괴시키는 그의 강론이 문제 되자, 옥스퍼드 대학 총장인 존 러트렐(John Lutterell, †1335)이 직접 그를 '이단' 혐의로 아비뇽 교황 요한 22세에게 고발했다. 51개의 문제 발언에 대한 심리가 1324년부터 4년간 지속되면서 점차 유죄 판결 가능성이 유력해지자, 오컴은 아비뇽을 빠져나와 피사로 달아났다. 마침 그곳에는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4세가 지나고 있었다. 그는 아비뇽 교황에 대항하여 로마에 니콜라우스 5세를 대립교황으로 세우고, 그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관'을 받아 귀환하던 길이었다. 왕을 만났을 때 오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저를 칼로 지켜주십시오. 저는 당신을 펜으로 지켜드리겠습니다"(Tu me defendas gladio, ego te defendam calamo). 이 말대로 오컴은 이후 주로 정치 현안을 다루며 교황이 세속권력을 넘보려는 시도를 반박하는 글을 쓰지만, 원래 오컴은 중세 논리학과 인식론의 대가였다.

무엇보다도 중세 전체를 뜨겁게 달군 '보편 논쟁'에서 오컴이 대변한 입장이 중요했다. 지식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이 '개념'인데, 이것을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통해 설명하려 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나 둔스 스코투스는 지성 안에 생성되는 '종'(種, species)이나 '공통본성'(natura communis)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 이런 입장을 '실재론'(實在論, realism)이라 한다. 그러나 오컴은 그런 식으로 개념에 대응되는 대상은 실재하지 않고, 개념은 한갓 '이름'(nomen)이나 '기호'(signum)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을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이라 한다. 지식은 원래 실재하는 대상에 개념이 대응할 때 성립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오컴은 지식의 의미를 바꾸어서 '우리가 뭔가를 안다'는 것은 먼저 감각 경험이 있고 이에 대한 추상 작용을 거쳐 보편개념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개념은 대상을 '지시'(supponere)하지만, 그 관계가 필연적이지는 않다. 엄밀히 따지면 개념은 우리가 만든 것이니, '허구'(fictum)의 성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오컴의 주장을 러트렐은 매우 위험하다고 보았다. 학문의 주요 개념을 그 대상의 실재 여부와 무관하게 우리 자신이 만든다고 하면, 학문은 한갓 인간의 자의적 생산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성경 말씀조차 모조리 진실되지 못하여 신뢰할 수 없는 공허한 문장이 될 우려가 있었다. 이에 맞서서 러트렐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충실한 제자이기를 자처하면서 '온건실재론'을 표방했다. 그러니까 보편개념의 내용으로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우리는 먼저 구체적인 개체에 내재하는 본질로 감각 경험을 통해 만난다는 것이다.

러트렐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대한 오컴의 주장도 문제성이 많다고 보았다. 예컨대 오컴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을 미워하도록 명령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러트렐은 하나님에 대해 언급한 저 발언이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으므로, 그런 말은 이미 그 자체로 성립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최고로 '선한 분'이시기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문과 같은 도발적 발언으로 오컴이 노렸던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이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모순율 따위에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 우리는 지적 접근이 아니라, 신앙과 헌신의 의지를 통해 다가가야 할 것을 오컴은 말하려 했다. 한갓 인간이 만든 개념 틀을 가지고 하나님을 재려 하지 말라, 인간의 개념이나 사고를 가지고는 그냥 이 세상과 관련된 이야기만 하고, 감히 하나님에 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말라는 것이 오컴이 말하려 했던 메시지였다.

러트렐은 교황에게 보낸 서신에서 영혼과 윤리에 관한 오컴의 입장에도 문제가 많다고 고발했다. 오컴에 따르면 우리는 뭔가를 먼저 직관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영혼에 관해서는 기쁨과 슬픔, 마음 속 의지의 작용 정도만 감각적으로 알 수 있지, 능동지성 같은 것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공허한 개념과 이름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능동지성을 부정하면 사후 영혼불멸성을 주장할 근거가 사라진다. 도덕에 있어서도 오컴은 필연적 계율 같은 것은 없다고 봤다. 하나님은 별다른 악을 행치 않은 사람도 처벌하실 수 있고, 죄인을 의롭다 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보편적 도덕법칙을 부정하면 모든 일의 판단이 하나님의 자의성에 내맡겨지게 될 우려가 있다.

이처럼 오컴이 기존 철학과 신학의 주요 가르침을 철저히 뒤집는 주장을 펼쳤고, 그것이 삼위일체론과 성만찬의 화체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자, 교황청 재판부는 더이상 오컴을 묵과할 수 없었고, 그를 공식적으로 정죄하려 했다. 그러나 오컴은 단순히 기존 교리를 옛것이라서 공격했던 것이 아니라, 이성을 넘어선 신앙의 세계를 펼쳐보이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후일에 마틴 루터가 시도한 종교개혁의 아이디어가 되었다.

안윤기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