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정치철학: 토마스 아퀴나스 대 단테 알리기에리

[ 인문학산책 ] 29

안윤기 교수
2021년 09월 01일(수) 17:19
토마스 아퀴나스(좌)와 단테 알리기에리(우).
정치는 민감한 주제이다. 다스리는 자가 있으니 다스림을 받는 자도 있으며, 계급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통치 권력의 분배를 놓고 여럿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정치는 이해관계가 선명한 세속적 영역이어서, 교회는 오랫동안 그 주제를 신학의 일부로 다루지 않았다. '고대 신학의 대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통치한다'는 행태를 바람직스럽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타락 이후 원죄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징계의 채찍이 필요하고, 그 역할을 하는 것이 국가라고 생각했다. 한 마디로 국가와 정치는 그리스도인의 세상살이에 '필요악'이라 본 것이다.

반면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정치나 군주의 통치를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의 '군주통치론'(De regimine principum, 1260)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사회적 동물이기에 국가의 출현은 인간의 본성에 걸맞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육식동물이 가진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초식동물이 가진 본능적 직관이나 빠른 발도 없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은 가장 약한 동물이지만, '이성'과 '언어'를 통해 타인과 대화하고 협력하여 생존할 수 있었다. 사회생활이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만큼, 무리를 이끄는 정치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토마스는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 만물은 목적을 가진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 만물이 '행복'(eudaimonia)을 추구한다고 했는데, 토마스는 그 입장을 적절히 조절해서 받아들였다. 국가와 정치의 존재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는데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 누리는 행복은 천상에서 누릴 더 큰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하기에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고, 국가는 교회의 시녀, 영주는 사제의 시녀, 황제는 로마 교황의 시녀라고 봄이 온당하다. 세상 권력자는 자기 백성을 이 땅에서 행복하게 해주어야 할 의무를 지니는데, 그 행복은 궁극적으로 천상의 행복으로 이어져야 한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에 관해 정치인은 성직자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결국 토마스의 정치철학은 교황중심주의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발상이 화근이라고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는 반발했다. 그는 '제정론'(De monarchia, 1316)에서 인간 본성을 분석하여, 인간이 가장 잘 사는 길은 이성의 힘을 발휘해 행복이 이르는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평화로운 환경이 중요하다고 했다. 토마스도 그렇게 보았지만, 단테도 인간에게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우리의 모든 잠재력을 발휘해 이 땅의 행복을 성취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천상의 행복, 즉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것으로서, 이 땅에 사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명심할 것은 두 가지 행복에 이르는 길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 땅의 행복은 우리가 철학자의 조언을 새겨들어서 진리를 인식하고 윤리 규범을 지키며 바르게 살 때 도달할 수 있다. 반면에 천상의 행복은 우리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명령대로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 때 도달할 수 있다. 첫 번째 목표와 관련해서는 철학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며, 두 번째 목표는 성령이 그리스도와 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바와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고 욕심이 과도하여서 종종 이 두 목표를 뒤섞는다. 특히 단테가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교황이 월권을 행하는데 있었다. 황제는 자기 통치 권역 내 평화를 유지하려 하지만, 교황이 영적 권위를 넘어 세속 정치적 권력까지도 차지하려는 것이 모든 혼란과 분쟁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단테에 따르면 국가와 교회는 상하 관계에 있지 않고, 나란히 공존한다. 인간의 두 가지 목표 성취를 각기 도우면서 말이다. 단테는 두 영역 모두에게 자율성이 주어져 있다고 보았다. 특히 신학이 철학에게 명령해서는 안 된다. 교황은 영적 권위를 족한 줄로 알고, 더 욕심을 부려 정치적 권위를 발휘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평화가 가능하고, 그런 환경이 조성되어야 인간의 행복도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상에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단테는 역설했다.

코로나 방역 조치로 교회의 각종 모임이 위축된 지 벌써 1년을 훌쩍 넘었다. 안전한 환경 조성의 당위성은 물론 인정하지만, 가끔 세속 정치 권력이 교회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 대한민국의 제헌의회가 하나님께 기도드린 것으로 시작했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작금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중세 때처럼 교회가 세속권력 머리 위에 군림하려 드는 것도 문제 있겠지만, 지금은 정치권이 교회의 자유로운 활동을 간섭하지만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도 국가도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립하는 것이다.

안윤기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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