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례 선생, 대한민국 건국포장 수상

최샘찬 기자 chan@pckworld.com
2021년 08월 15일(일) 17:46
1972년 목련장을 수여한 김필례 선생.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제17~20대 회장을 역임한 고 김필례 선생이 15일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아 건국포장(建國褒章, National Foundation Medal)을 수상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정부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해 민족자존의 가치를 높이 세우신 김필례 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려 건국포장에 포상하기로 결정했다"라며,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선생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은 대한민국 발전의 밑거름이 됐으며, 귀감으로서 후세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김필례 선생(1891~1983)은 1972년 국민의 복지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으로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한 바 있다. 이번엔 대한민국 건국과 민족의 독립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다음 가는 훈격인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김필례 선생은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을 실천하며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희생의 삶을 살았다. 김필례 선생은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후 1916년부터 독립운동을 위한 중국 치치하얼이상촌, 정신여학교, 광주여성야학 등의 교사로서 민족의식 교육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에 적극 헌신했다.

김필례의 조카인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는 1919년 일본 유학중 2.8독립선언문을 국내로 들여왔다. 당시 김필례 선생은 광주 자택에서 독립선언문을 복사와 배포를 도왔고, 김마리아가 서울로 가져간 독립선언문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김필례 선생은 1919년 광주지역에서 3.1운동을 이끌었고, 김필례 선생에게 역사를 배운 정신여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 5일 대한문 앞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김필례의 시숙 최흥종 목사 역시 광주 3.1독립만세시위를 기획했는데, 그는 서울 3.1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해 체포됐다. 광주에선 3월 10일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김필례 부부는 만세시위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체포됐지만 그녀는 곧 석방됐다. 남편은 혹독한 문초를 받았으나 다행히도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1937년 김필례 선생이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에 신사참배 거부 명목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고 김필례 선생은 1950~1959년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제17~20대 회장을 역임하며, 여전도회 재건에 앞장섰다.

6.25전쟁의 영향으로 여전도회전국연합회의 운영이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김필례 전 회장은 미국 장로교 북장로회의 재정지원을 얻어 냈으며, 1956년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가를 제작해 회원들의 단결력을 집중시켰다.

이어 김필례 전 회장은 1957년 월례회 인도책을 속간하면서 전국 지교회의 여전도회가 정기적으로 모이게 했다. 그 결과 여전도회는 13개 연합회에서 26연합회로 증가했다. 이 때부터 여전도회는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고, 미국과 동남아시아 교회여성들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또한 김필례 선생은 한국YWCA 창설자다.

김필례 선생은 일본 유학생활 중 YWCA의 경험을 통해 1922년 대한YWCA를 창설했다. 김필례 선생은 한국YWCA 초대총무로서 한국YWCA연합회조직의 근간을 갖추고 북한의 YWCA를 포함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지역조직에 힘쓰는 등 YWCA를 통해 실천하는 기독여성의 소명을 감당했다.

1950년 후에는 광주YWCA 총무로 활동하며 주체적인 여성교육의 현장을 이끌고 한국의 기독교 여성운동의 태동과 확산에 기여했다. 여성으로서의 자아 주체성을 강조하고 신앙을 근간으로 평등교육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까지 여성의식에 대한 교육과 실천을 강조했다. 해방 이후 정신여자중학교 교장, 정신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에 헌신했으며, 1984년 향년 93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최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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