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권에 대한 도전: 카타리파와 발도파

[ 인문학산책 ] 25

안윤기 교수
2021년 07월 21일(수) 07:47
카타리파는 안수를 통해 성령의 능력이 전달된다고 믿었다.
어떤 사회든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히면 우위를 점한 세력이 보수화를 주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반발하는 세력이 등장해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12세기 서유럽의 모습도 그러했다. 로마 교황을 정점으로 한 성직자 조직이 정비되었고, 도시와 시골 마을 구석까지 교회가 세워져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지배했다. 사회적으로도 십자군 전쟁을 통해 동방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전반적인 부의 증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익이 다수에게 돌아가지 않고 소수만 누리자, 서서히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가진 자의 편이었다. 교회는 각 지역의 실력자들과 협력하고, 또 평신도의 재산과 토지 기증을 받아 많이 부유해졌다. 성직자의 권위도 늘어나, 물질과 권력 면에서 사제직이 선망의 대상이 되면서, 예기치 못했던 문제도 생겨났다. 성직 매매가 이뤄지고, 사제가 내연 관계를 통해 얻은 자식을 공공연히 챙기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교회 정화"를 외치는 목소리도 높아져 갔다. "그레고리 개혁" 같은 교회 내부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외부에서 주어진 충격 또한 엄청났다.

발도파는 가난한 자에 대한 무료급식 사업을 중시했다.
프랑스 남부에서는 '카타리(Cathari)파'가 조직되었다. '청정함'을 뜻하는 헬라어 'katharos'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딴 이 집단은 그 명칭대로 "순결한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의 세계관이 독특했다. 그들은 세상을 선과 악의 대립으로 보아서, 악을 멀리하고 오직 선만 추구하려 했다. 악은 구약의 신인 악마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악마는 인간 육체를 포함한 물질적인 모든 것을 통치한다. 반면에 신약의 신은 영적인 것만 주관한다. 인생은 죄악 덩어리인 육체의 감옥에 영혼이 감금된 것이다. 자식을 낳는 것은 세상의 악을 증가시키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결혼이나 사유재산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금욕적 삶을 살며 더러운 세상과의 관계를 끊을 때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들은 가르쳤다.

황당한 이론이지만, 세속에 욕심을 두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욕심 많고 부패한 교권주의자들의 모습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어, 그들의 추종자가 수백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로마교회는 베르나르나 도미니쿠스 같은 인물을 보내어 설교와 토론을 통해 그들을 회유하려 했지만, 선악 이원론에 기초한 그들의 논리는 의외로 탄탄해서 설득에 성공하지 못했다. 특사를 보내 출교와 파문 위협으로 그들을 누르려 했지만, 그들은 도리어 교황사절을 살해했다. 그러자 교황은 1209년에 십자군을 소집하여 그들을 잔혹하게 토벌했다.

'발도파'는 리옹의 피에르 발드(Pierre Valdes, 1140~1205)에 의해 시작된 조직이다. 발드는 부유한 상인이었는데, 회심 이후 가진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 모임을 조직하여 사도적 청빈 생활을 실천했다. 또 그는 성경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 말씀을 많은 이에게 가르치고자, 라틴어 성경을 불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교회의 전례인 미사, 고해, 성인 공경 등을 부정하고 평신도 사제직을 주장하는 등, 교권주의자들이 볼 때 다분히 위험한 인물이어서, 리옹 주교는 그의 설교를 금지했고 교황은 그를 파문했다. 그렇지만 발도파는 지하로 숨거나 이탈리아 북부, 독일 서남지역으로 이주해 명맥을 유지했으며, 후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일파로 흡수되었다.

카타리파와 발도파는 12세기 교회와 사회 질서에 최대 위협이 되는 세력이었다. 그래서 교권주의자들은 그들을 파문했고, 이단으로 규정했고, 세속 영주의 힘을 통해 탄압했다. 이단 세력을 처리하는 절차와 제도도 이때 정비되었다. 문제 발생시 공의회에서 일정한 논의가 있은 후 이단이라 판단되면 공의회에서 해당 집단을 정죄하고, 관할 교구에 주교재판소를 설치해 이단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주교가 감당하기 벅찬 사례들이 연이어 등장하자, 교황 그레고리 9세는 교황 직속 이단심문소를 상설하고 심문관을 임명해 그 운영을 담당케 했다. 그리고 중죄자는 세속 군주와의 협의에 따라 처형케 했다. 이렇게 '종교재판'이라고 불리는, 이후 악명을 드높일 이단 심문 제도가 시작되었다.

다른 한편 카타리파와 발도파 이단은 중세 교회 발전에 큰 도전을 주었다. 먼저 카타리파 못지않은 헌신과 금욕적 삶, 그리고 그들을 논리적으로도 꺽을 수 있는 학식 있는 설교자를 양성하려는 의도에서 '도미니쿠스 수도회'가 성립되었으며, 발도파 같은 사도적 청빈과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복종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 속에서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 두 수도회는 이후 중세 교회와 사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안윤기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