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 문제: 베렌가리우스 vs. 란프랑쿠스

[ 인문학산책 ] 21

안윤기 교수
2021년 06월 29일(화) 17:04
란프랑쿠스와 베렌가리우스. (신앙의 신비를 강조한 란프랑쿠스에게는 후광이 빛나는 반면, 논리적 이해를 추구했던 베렌가리우스는 구석에 조그맣게 꿇어앉아 있다) 작자 미상, 18세기, 베크수도원 소장.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란 문장은 곱씹을 수록 감탄하게 되는 명문이다. 처음 믿을 때부터 모든 영적 진리를 다 터득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는 어떤 계기를 통해 믿음을 얻지만, 다음 단계에서는 그 내용을 이해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가는 과정이고,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과 훈련이 필요한 법이다.

서양 지성사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발견된다. 로마의 붕괴, 게르만족의 침입 등으로 온통 혼란스럽던 시절임에도 복음은 선포되고 기본 교리는 형성되었다. 성만찬 예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것은 내 몸이다"(Hoc est enim corpus meum)라는 제정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떡이 예수님의 몸이라고? 수백 년간 그 문장의 의미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넘어갔지만, 9세기와 11세기에는 이를 둘러싼 신학 논쟁이 벌어졌다.

먼저 9세기에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Paschasius Radbertus, 785~865)가 "성만찬의 떡은 승천한 그리스도의 몸과 동일하다"고 주장한 것이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리스도가 실제로 떡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실재론'은 곧바로 라트람누스(Ratramnus, ?~868)와 라바누스 마우루스(Rabanus Maurus, 780~856)에 의해 비판받았고, 대신 이들은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제안했다.

그 후 한동안 잠잠하다가 11세기 중반에 이 문제가 다시 불거져서 유럽 전역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 불길이 되었다. 그동안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성당학교, 수도원학교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문법, 논리학, 수사학에 대한 사람들의 교양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다른 한편, 교회 조직이 정비되면서 성스러운 영역과 세속 영역,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강조되었다. 성직자는 - 독신 생활에서 볼 수 있듯이 - 일반인과 다르며, 교회에서 행하는 성사(聖事, sacramentum)는 이 세상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고 했다. 미사 현장에서는 제정의 말씀("이것은 내 몸이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고, 축성된 떡에 경배하고 기도할 때 기적을 경험했다는 간증이 이어졌다. 요컨대 일반인은 좀 더 '논리적'으로 사고하게 된 반면, 성직자는 '신앙의 신비'를 이전보다 더 강조하게 되었다.

베렌가리우스(Berengarius, 999~1088)는 프랑스 샤르트르 성당학교에서 교육받고, 고향인 투르에 돌아와 그곳 성당학교 교장을 했던 인물이다. 그의 학식이 널리 알려져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 배우고자 몰려왔다. 그는 9세기에 있었던 성만찬 논쟁을 알고 있었고, 라트람누스의 의견(영적 임재설)이 옳다고 보았으며, 성만찬 떡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을 학생 중 누군가 듣고 문제 삼았다. 그가 교회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이단 사상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란프랑쿠스(Lanfrancus, 1010~1089)는 샤르트르 성당학교에서 베렌가리우스와 함께 공부했던 사람이다. 후에 그는 베크에 자기 학교를 세워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쳤으며, 영적 체험을 하고 나서는 수도원에 들어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에게 로마 교황은 성만찬 문제를 정리하는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와 '속성' 개념을 이용해 성만찬을 실재론적으로 해석하는 모델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 해석모델이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화체설'로 승인되어, 지금까지 가톨릭 진영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

1050년, 베렌가리우스는 란프랑쿠스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9세기 파스카시우스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리고 그런 실재론적 성만찬 해석은 '실체'와 '속성' 개념을 잘못 이해한 결과로 나오는 오류추리임을 지적했다. 그렇지만 란프랑쿠스는 곧바로 이 편지를 로마 공의회에서 회람케 했고, 거기서 베렌가리우스의 견해는 정죄된다. 성만찬의 떡이 그리스도의 몸임을 그가 부정했기 때문에, 즉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베렌가리우스 입장에 대한 왜곡이었다. 그는 떡에 그리스도의 몸이 물질적으로 임재한다는 발상만 비판한 것이지, 임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는 후에 칼뱅이 주장할 '영적 임재설'에 가깝다)

1054년, 교황청 특사인 힐데브란트 추기경이 주재한 공의회가 투르에서 열렸다. 베렌가리우스는 이 자리에서 "떡과 잔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마지못해 고백했다. 프랑스 주교들은 대충 그 정도로 베렌가리우스를 둘러싼 성만찬 논쟁을 종결짓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30여 년을 더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강제로 '신앙고백'을 해야 했다. "축성 후 떡과 잔의 실체가 바뀌며, 그리스도의 몸이 사제의 손에 의해 찢어지고, 신자의 이빨에 갈갈이 물어뜯겨 나간다"는 원색적 표현을 강요당하다가, 그만 실신하기도 했다. 그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제정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신성 모독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나 당대 교회의 주도세력은 영적 임재 정도의 성만찬 이해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떡이 성체이고, 교회가 성역이며, 신부가 성직자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 명제를 설득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논리학을 동원했으며, 그래도 설명이 궁한 지점에서는 신앙의 신비를 내세웠다. 그리고 공의회를 통해 성만찬을 화체설로 이해하라고 확정했다. 힘으로 밀어붙인 셈이다. 신앙은 이해를 추구하지만, 온전한 이해는 이상일 뿐, 이 땅에서 가능한 것 같지는 않다.

안윤기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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