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 재료 

[ 성지의식물 ] 이강근 목사 20. 가시나무

이강근 목사
2021년 06월 15일(화) 08:32
식물 자체가 가시인 가시나무.
성지의 지천에 자라나는 가시나무.
가시나무를 자세히 보면 온통 가시다. 만지기 조차 어려운 가시덤불.
성지의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 식물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가시나무다. 가시가 있어 불린 나무로 이름이 따로 없다. 양과 염소조차도 먹지 않는 이 가시나무가 성경에 등장한다. 누가 심거나 가꾸지 않아도 지천에서 자라난다.

솔로몬은 그의 전도서에서 이 가시나무를 언급한다.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도다"(전7:6).

솔로몬은 우매자의 웃음소리를 이 가시나무 타는 소리에 비유한 것이다. 불이 붙으면 붙기가 무섭게 타올랐다가 바로 꺼진다. 그러면서 바싹마른 나무대와 씨방이 갈라지고 터지며 '다다닥' 소리를 낸다. 솔로몬은 이 소리를 놓치지 않고 우매자의 웃음소리에 빗댄 것이다.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만 요란 할 뿐 불이 오래가지 않듯이 우매자의 웃음도 순간 요란할 뿐이라는 교훈이다. 마치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우리의 속담과도 같다.

다윗도 가시나무 타는 것을 시로 읊었다.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시58:9). 마른 가시나무에 불을 붙였는데 장작에 옮겨 붙기 전에 바람이 불어 꺼진 것처럼 악인의 계획이 훅 꺼져버리기를 바란다는 싯구다.

히브리어로 가시나무를 '씨라'라고 한다. 그런데 냄비를 '씨르'라고 한다. 아주 작은 빨간 꽃이 붉은 도자기 냄비를 연상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솔로몬의 냄비 밑에서 가시나무 탄다는 것은 씨르(냄비) 밑에 씨라(가시나무)가 탄다는 언어의 유희를 표현했다. 광야의 베두윈들은 지금도 냄비 밑불의 땔감으로 가시나무를 사용한다. 세 개의 돌로 삼발이를 만들고 그 위에 주전자 하나 올려놓고 가시나무로 금세 차 한잔을 끓여낸다.

이사야 선지자는 가시나무를 폐허의 상징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승냥이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사34:13).

이스라엘엔 이 가시나무에 관한 유대인의 동화가 있다. '가시나무 우리의 친구'라는 이야기다. 이스라엘에 성전까지 파괴되는 전쟁이 나고 백성들은 모두 피난을 떠났다. 피난민 중에는 어린 소년과 어머니가 있었다. 몇년이 지나 어머니가 향수병이 났다. 성지의 산야에 있는 가시나무 뿌리를 먹으면 낫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려운 여행길 끝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집은 폐허가 되었고 대신 쓸모없이 가시나무만 무성하게 자라났다. 소년과 어머니는 이 가시나무를 잘라 빗자루를 만들어 마당을 쓸었다. 가시나무 덤불을 잘라 무너진 담장을 쌓았다. 지저분해진 우물은 가시나무로 필터를 만들어 나뭇잎들을 걷어냈고 우물 위는 가시나무 덤불로 덮었다. 무엇보다도 따듯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 가시나무 땔감으로 불을 지폈다. 딱딱한 돌바닥에는 가시나무 덤불을 한움큼씩 깔아 침대를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가시나무 만큼 유용한 것이 없었다.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이 가시나무야 말로 재기할 수 있었던 유용한 생활기반이 된 것이다. 이 동화가 주는 교훈은 세상에 가장 쓸모없을 것 같은 가시나무가 우리의 유용한 친구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야전에서 야영을 하면 이 가시나무를 침대처럼 바닥에 깔고 잔다. 산책하던 중 아내가 돌에 걸려 털썩 주저앉았다. 다행히 가시나무 위다. "따갑기는 했는데 의외로 푹신하네"라며 일어난다.

예수님은 아궁이에 던져질 이 들풀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고 말씀하신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눅12:28). 들풀마저도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피로 값주신 우리 인간이야 말로 얼마나 사랑하겠냐는 말씀이다.

성지의 현지인들은 2000년 전 로마병정들이 예수님에게 씌운 가시관이 바로 이 가시나무라고 한다. 그래서 고난주간이 되면 현지 기독교인들은 가시나무로 가시관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한다. 고난주간에 가장 의미있는 선물이기도 하지만, 따갑고 다루기 힘든 가시를 무릅쓰고 만든 정성 때문에라도 고마움을 느낀다.

지천에 깔려있고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은 이 가시나무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쓰셨던 그 가시관이 된 것이다.

이강근 목사 / 이스라엘 유대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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