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교회 대 서방교회: '샤를마뉴 저작'

[ 인문학산책 ] 19

안윤기 교수
2021년 06월 10일(목) 07:21
성상(좌)과 샤를마뉴 저작(우).
서로마 지역이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인한 대혼란에 빠졌을 무렵에도 동로마 지역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스리던 황제의 치하에서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에는 과거 로마 제국의 영광이 이어졌고, 신학적 논쟁거리를 공의회 소집을 통해 정리하던 주도권도 그쪽에 있었다. 그러나 샤를마뉴의 영도 하에 프랑크 왕국이 서로마의 영토를 회복하면서, 이제 서방세계는 신학 분야에서도 강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문서가 '샤를마뉴 저작'(Libri Carolini)이다.

이 문서는 '성상 논쟁'을 다룬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성상(icon)과 성화는 교회 역사에서 아주 큰 문젯거리였다. 문맹이 수두룩하던 시절(심지어 샤를마뉴도 문맹이었다), 성경 이야기를 담은 그림은 전도에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예배당 공간에 적절히 배치된 성화나 동상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경건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그림 자체를 신성시하기도 했다. 그들은 성상 앞에 기도하고 기적도 체험했다. 예수께서도 영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입으셨으니, 그분 모습을 담은 예술작품도 비록 물질이지만 어느 정도는 신성이 깃든 것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성상 사용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도 있었다. 이건 십계명에서 엄히 금한 우상 숭배가 아니냐는 것이다. 동로마 황제 레오 3세는 성상 사용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고(726년), 이윽고 무력으로 성상을 파괴하는 광풍이 전 세계에 휘몰아쳤다. 그러나 50여 년 후 황제가 바뀌면서 성상에 대한 신학적 논란이 다시 불거지다가, 최종적으로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년)에서 정리되었다. '예배'(latreia)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지만 '공경'(proskynesis)은 피조물에게 행해도 된다고 하여, 결국 성상 사용은 허용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서방 지역의 반응이다. 로마 교회의 수장인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는 니케아 공의회의 성상 수용 결정을 반겼다. 그렇지 않아도 게르만족 선교를 위해 성상 사용이 절실했던 차였다. 그러나 뜻밖의 공격이 아헨에서 날아왔다. 샤를마뉴가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 "공의회 결의안을 거부하라"고 압력을 가한 것이다(792년). 그리고 이에 대해 교황의 응답이 시큰둥하니까, 공의회 결의안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문서를 직접 작성했다. 그것이 바로 '샤를마뉴 저작'이다. (물론 이 문서를 샤를마뉴가 직접 쓴 것은 아니고, 서유럽 신학자들에게 과업을 줘서 작성하게 한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 문서의 실제 저자로 오를레앙의 주교 테오둘프(Theodulf of Orleans, 750~821)를 지목한다. 어쨌든 이 문서는 샤를마뉴의 승인을 받은 것이고, 동방과 구별되는 서방교회 신학의 특징을 드러낸 귀중한 자료이다.)

'샤를마뉴 저작'은 성상을 철저히 물질로 규정한다. 거기에는 어떤 신성도 깃들어 있지 않다. 성상의 가치는 그저 교회를 장식하고 과거 일을 상기시키는 것에 국한되어야 하며, 마치 성상이 능력을 가진 것처럼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린 성화는 모방에 지나지 않으며, 모방품과 원형은 철저히 구별된다. 물질적 표현에 담긴 영적 진리는 육신의 눈이 아닌 심령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성상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껏 신학 논의를 주도했던 동방 교회는 잘못된 길로 빠져들었고, 그런 탈선의 근본 원인은 비잔틴 황제에게 있었다고 '샤를마뉴 저작'은 지적한다. 한갓 물질인 성상에 신성이 깃들었다고 생각한 방식 그대로, 세속군주인 황제에게 특별한 영적 지혜가 임하여 그가 신학 논쟁에 대해서도 '감 놔라 배 놔라' 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공의회는 허울뿐이고 실상 비잔틴 황제의 뜻에 따라 지금까지 온갖 신학적 결정이 내려졌는데, 그런 잘못된 관행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방 중심의 기존 신학이 통째로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기존 신학과 교회의 관행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단 말인가? "성경에 따라서" 정통 신학이 바로 잡혀야 한다고 '샤를마뉴 저작'은 역설한다. '성경에 따른 종교개혁',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16세기 종교개혁의 구호가 이미 8세기 문서에 등장했다.

이처럼 당시로써는 매우 과격한 내용을 담은 저작을 작성했지만, 샤를마뉴는 이것을 교황에게 보내지 않았다. 교황과의 관계를 너무 껄끄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필사본으로 보존되던 이 문서는 1549년에 프랑스에서 처음 출판되는데, 그것을 일찍 접한 사람이 쟝 칼뱅(Jean Calvin, 1509~1664)이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샤를마뉴 저작'을 여러 차례 인용하면서 개신교 신학의 골격을 세우려 했다. 8세기에 종교개혁을 추구했던 바로 그 구호를 통해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동방과 구별되는 서방교회의 자립성을 세우려 했던 바로 그 발상을 통해 서방 가톨릭교회의 품에서 개신교가 독립해 일어났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안윤기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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