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 인문학산책 ] 16

박원빈 목사
2021년 05월 18일(화) 10:31
Leo Hass작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체코 테레지안스타트의 시각장애인들이 서로 연대하여 어둠을 헤쳐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회 양극화 현상, 세대 간의 갈등, 빈익빈 부익부의 심화 등 우리 사회가 점점 갈등과 분열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혐오와 배제가 만연한 현대 사회 모든 갈등의 근원에는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강자가 약자를 대상화하고 도구화함으로 파괴적인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서구 철학자 중에 이런 인간관계에 내재한 모든 힘의 논리를 거부하고 나보다 '타자'를 더 우선시 할 것을 주창한 철학자가 앞서 한 번 언급한 엠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이다.

리투아니아의 작은 마을 카우나스라에서 태어난 레비나스는 정통 유대교 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해 기존의 서구 철학과 전혀 다른 사상의 전환을 하게 된 계기는 홀로코스트였다. 독일 나치에 의한 유대인 집단 학살인 홀로코스트는 인류가 지금까지 이룩한 근대성의 몰락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근대성은 인간 이성을 통해 실존을 억누르던 신화와 종교로 대표되는 반이성주의(anti-rationalism)를 극복하고자 한 계몽주의 프로젝트였다. 근대의 정점에 서 있는 칸트 철학은 이성이야말로 타인에 대한 책임의 발로(15회 연재 참조)라고 보았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이러한 이성에 의해 요청된 책임은 언제든지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 조작될 수 있으며 도리어 타인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레비나스는 책임의 연원을 이성적 합리성에서 찾을 때 발행하는 모든 병폐들을 삶 속에서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그렇다고 레비나스가 탈근대성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던니스트들처럼 이성을 부정하거나 용도폐기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관계 안에 있는 책임적 존재이다

근대 이성이 도구적 합리성으로 빠진 이유는 바로 인간 존재가 지닌 관계적 성격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주체가 지닌 관계성을 무시하고 유아적 자아론에 빠질 경우 주체는 언제든지 이데올로기에 의해 쉽게 경도되거나, 나와 너의 힘겨루기에 빠지게 된다. 인간주체는 오직 타자와의 책임적 관계를 통해서만 온전히 유지될 수 있으며 주체가 이렇게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타자의 초월적 성격에 있다. 레비나스에게 타자의 얼굴은 신의 현현이 드러난 초월의 흔적이다. 타자의 '얼굴'은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소유할 수도 없는 대상이다. 얼굴은 나의 통제를 벗어나 세상을 초월한 무엇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타자의 얼굴을 가리켜 '윤리적 저항'(ethical resistance)이라고 했는데 윤리적 저항은 자아중심적 성향(egoistic trend)이 타자의 지위를 빼앗고 그것을 말살하는 장소에서 발생한다.

레비나스가 다른 윤리학자들과 대비되는 가장 두드러진 점이 있다. 타자를 이성 안에 있는 인간적 관계망 안에 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저편으로, 나와는 다른 절대적 다름으로 상정한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윤리적이어야 할 이유를 이성에서 찾지 않는다. 우리가 윤리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타자의 신성에 있다. 타자는 우리에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타자가 나를 향해 외치는 도움은 단순한 도움의 소리가 아니라 초월의 영역에서 나의 삶 속에 침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타자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윤리적 관계를 통해서라고 역설한다.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를 헬라철학의 히브리적 해석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성 중심의 헬라철학은 근대 이후 하나님의 초월성을 철학 담론에서 배제시켰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칸트 이후 근대철학이 포기했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윤리 안에서 다시 복원시킨 것이다. 이는 유대인이며 철학자였던 레비나스가 히브리 성경(구약)에 기초한 철학자였음을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예수가 중심인 기독교 공동체

홀로코스트를 체험한 유대교 철학자로 타자윤리를 주장하는 레비나스의 주장을 십분 공감할 수 있다. 철학자의 사상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비판과 수용보다는 성경에 근거한 판단일 것이다. 레비나스가 예수를 타자를 위한 유일한 대속자로 보는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레비나스는 그의 논문 '유대교와 케노시스'에서 이를 분명히 반대하고 있다. 또한 다른 글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신-인 교리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대교 철학자가 지닌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레비나스의 타자를 위한 중요한 외침을 경청하면서 그의 주장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은 사실 성경에 충분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을 물었을 때 예수는 하나님 사랑(초월)과 인간사랑(윤리)으로 답 하신다. 신학은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과 만남일 뿐 아니라 사람 사이(in between)의 만남을 두 축으로 이뤄짐을 가르쳐주신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 12:31)" 라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인 첫째 계명과 이웃 사랑의 둘째 계명이 가진 동전의 양면과 같은 성격을 말씀한다. 신성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기까지 자기를 비우시고 고통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예수는 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에 신성의 자취가 있다고 말한다. 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타자의 얼굴은 또한 죄로 물들어 있다. 우리가 만나는 이웃은 나와 같이 실수하며 낙담하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이웃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신적 경배나 숭배해야 하는 초월적 존재는 아니다. 기독교는 타자를 공동체 안으로 초청하여 그들과 함께 한다. 물론 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며 교회 공동체는 예수를 중심으로 하나님과 세상 속에서 사랑을 실천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나를 지배하는 이기적 자아를 물리치고 예수가 실천하고 보여주신 참된 사랑을 따르기 위함이다.

기독교 인문학은 하나님, 자아, 이웃의 삼각형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야 건강한 인문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16회에 걸쳐 서구 인문학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하나님 없는 인문학은 교만에 빠지고 예수 없는 인문학은 사변일 뿐임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의 한 구절로 연재를 마친다. 여러 경로로 귀한 피드백을 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하나님, 당신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I.i.1)

박원빈 목사 / 약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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