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나타난 사회정의와 휴머니즘

[ 주간논단 ]

곽재욱 목사
2020년 12월 25일(금) 10:00
온 세계가 목을 빼고 기다리던 코로나 백신이 드디어 개발되어 그 접종을 시작했다. 백신 개발의 선두주자는 미국이었다. 그러나 미국 기업, 화이자 백신의 1호 접종 대상은 영국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주간 뒤,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코로나의 최대 피해국이었던 미국의 1호 접종이 실시되었다. '앵글로-색슨' 세계의 긴밀함과 함께, '존재에 대한 계약의 우위'라는 국제사회의 작동구조에 대한 재학습 기간이었다. 그 가운데, 영국은 1호 접종 대상자로 90세 할머니를 선정했고, 미국은 종합병원 중환자실의 흑인 여성 간호사를 선정했다. 즉, 영국은 '휴머니즘'을 선택한 데 비하여, 미국은 '사회정의'를 선택한 것이다. '휴머니즘'과 '사회정의'는 인류가 함께 염원한 가치이자 이상이지만, 때로는 서로 물리치는 대적이 되어 어긋나고 부딪히기도 한다. 우리의 현실 체험은 언제나 그 두 이상의 공존과는 거리가 있어왔다.

아직 갈 길이 멀고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코로나 백신의 개발은 방역을 넘어서서 인간세상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일대 사건이 될 것이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Pandemic)' 상황 가운데 인류는 이전 500년래에 없었던 정의와 평등을 역설적 방식으로 맛보았다. 그것은 실로 16세기 신대륙발견과 그로부터 촉발된 '대항해시대'가 편성했던 '식민주의 시대',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신-식민주의 시대'로 재편되어 온 부정의의 세계질서 가운데 전례 없는 지구적 정의였다. 세계의 'G2', 중국이 '코로나 발생국'이었고 미국은 그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 가장 힘센 사람- 미국 대통령 트럼프, 최고의 금수저- 영국 왕세자 찰스, 스포츠 스타- 호날두, 우사인 볼트… 코로나에 감염되었던 몇 사람들의 면면만 들어도 이 한해 동안 코로나가 인류를 얼마나 평등하게 대우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해소(카타르시스)의 정의'의 수준을 넘어서서 우리 모두가 실제로 체험했던, 파라오의 아들조차 피해갈 수 없는 총괄적 사회정의였다.

코로나 사회정의는 한국교회의 현실체험이기도 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예배실은 최대 800명 용적이다. 지난 주일, 시간마다 소독수를 뿌리고, 창문을 열고, 차단막을 치고서도 20명도 안 되는 인원이 주일예배를 드렸다. 강대상 위에서 장의자 예닐곱 줄에 한 사람씩 앉아있는 예배실을 내려다보는 눈이 민망한 가운데 차례로 이어진 질문 세 가지. 첫째, '꼭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우리 사회 중에 이렇게 철저하게 방역되는 곳이 교회 외에도 다른 곳이 있던가?' 둘째, 이웃의 어느 작은 교회가 떠올랐다. '그 교회는 평소에도 20명 모여서 예배드리는 교회이니 이런 인원제한 같은 것 필요 없을지 모르겠네?' 셋째, 이어진 질문은 그 반대편으로 건너가 이어졌다. '2만 명이 예배를 드린다는 그 교회 역시 지금은 20명 아니겠는가? 그 교회는 정말 참담하겠구나!' 실로 코로나 정의가 아니었다면 상정할 수 없는 한국교회의 절대 평등상황이었다.

약국 선반 위의 약들은 질병과 증상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지난 9월과 10월의 두 달간 한국은 코로나 방역의 최강자로서 그 '국격'은 상한가를 쳤다. 소위 'K-방역'의 성공으로 우리는 그 동안 선망의 대상이었던 미국과 유럽 열강들에 대한 우월감을 한껏 만끽하는 기간을 즐겼다. 문화-스포츠 한류에 이은 '방역한류'의 양탄자를 타고 우리는 하루에도 십만팔천 리를 날아다녔다. 그러나 그 양탄자의 낭만이 백신의 순번을 챙기는 합리까지 소홀히 하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현실적 판단을 흐리게 했다.

2월에 시작된 코로나는 우리 사회에 연중 삼차에 걸친 파도로 덮쳐왔다. 돌이켜 보건데 각각의 파도는 각각의 서사(epic)로 그려졌다. 2월에 있었던 첫 번째 큰 파도소리는 '신천지 고소'로 들려왔다. 그 때 한국교회는 '신천지'라는 피고소인 명단에서 자신을 제외시키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와 같은 노력들이 부분적으로 성공하였고, 부분적으로 실패하였음은 2차 파동의 와중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8월에 시작된 2차 파동에서 세상은 아예 작심하고 한국교회를 겨냥하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대응의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소위 '광화문 집회'라는 운동과 집단으로부터 스스로를 확실하게 제외시키거나, 그 취지와 열정을 다름 아닌 한국교회의 본령으로 고백하거나의 양단으로 나누어져 대립하는, 한국교회 역사의 고질적 병폐를 다시 한 번 생생하게 드러냈다. 그 어느 쪽이든 절반의 성취일 뿐이었다. 모든 교회가 그렇다거나, 혹은 모든 교회가 그렇지 않다는 항변들은 단지 한국교회의 스스로를 향한 판단들일 뿐, 세상은 한국교회의 대응들을 보면서 그 간에 그들이 교회에 대하여 세운 가설들을 확증하였다.

백신의 개발은 코로나가 우리에게 역설적 방법으로 선사했던 잠정적 정의를 원점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개발된 백신의 통제력이 미국과 영국, '영어 쓰는 나라들'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그들을 향했던 우리들의 비웃음의 근거는 방역의 우월감과 역병의 사회적 정의의 기묘한 혼합 조제였다. 그 와중에 한국교회는 지난 일 년 내내 우리 사회의 종속변수(dependent variable)로 시달리다가, 이제는 백신의 개발과 함께 세계의 종속변수로 전락할 수 있다는 뜻이다. 비난과 통제, 우월감과 분열로서는 위기에 대한 효능 있는 처방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방역은 기본적으로 '백신'과 '치료제'의 두 가지로 완성된다. 백신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고, 치료제는 감염자를 대상으로 한다. 백신은 미래를 예방하고, 치료제는 과거를 고친다. 공포와 비난의 파도 가운데 한국교회는 2020 지난 일 년 내내 비난의 과녁, 분열의 당사자였다가, 백신 개발의 현재에 이르러서도 접종을 대기하는 뒤 처진 대상자 이상의 적극적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의 허망한 결국에 이르기 전에, 제발 한국교회가 통제변수(control variable)로서의 제 모습을 회복하여 이 시대와 우리 사회의 진정한 영적 치료제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 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해 본다.



곽재욱 목사/동막교회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