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버리지 못한 빛바랜 사망진단서

[ 목양칼럼 ]

김명서 목사
2020년 11월 13일(금) 13:17
필자의 심방용 가방 속에는 20년이 넘은 종이쪽지 하나가 지금도 있다. 이제는 낡고 헤어져 글씨조차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문서이지만 그것을 버릴 수가 없다.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다. "사망진단서 김한길."

그때가 결혼하고 몇 년 지난 즈음, 부목사로 천안중앙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두 번째 자녀 한길이가 태어나서 첫 돌을 맞이할 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기어 다녀야 할 때인데 기어 다니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했다. 몸은 등으로부터 점점 휘어져 가기 시작했다. 병명은 "무뇌증"이라는 희귀한 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던 날, 필자를 잘 아는 의사분은 본인이 무슨 죄를 지은 것인 양 그 아이를 이리저리 안아보다가 "목사님 한길이는 앞으로 잘 견뎌야 5~6년 정도입니다." 부정하는 저에게 휘어진 등을 보이면서 "목사님 제가 오진이기를 바랍니다." 가슴이 저며 온다.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는 표현이 그때서야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 아이가 아프다는 것과 길어야 5년 정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는 무척이나 많은 시간을 방황했다. 목사로서 감당하기가 사실은 너무 힘들었다. 성도들이 수근거리는 것만 같아서 이중, 삼중 장애를(신체장애와 지능장애) 가지고 있는 자녀를 품에 안고 환한 대낮에 밖을 나갈 수가 없어 캄캄한 밤에 그 아이를 안고 서성였던 수많은 날, 화가 났다. 열심히 교회 섬겼는데,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하필 나일까?

그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삼켰을 아내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누군가는 장애를 가진 부모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그 아이는 영혼이 참 맑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천사와 같아요. 기도하며 이겨나가세요." 사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속으로 삼키는 울음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에게 따지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억울한 생각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그래서 부모도 장애를 가진다고 하는가 보다.

누군가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었다. 힘들 때 가장 많이 생각나는 분이 엄마였다. 그때만큼이나 먼저 하늘나라 가신 엄마가 그리운 적이 없었다. 정채봉 시인의 "엄마가 휴가 나오시면" 이라는 시를 읽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 맞춤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번 만이라도 엄마 …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 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그렇게 한길이는 몇 년을 더 살다가 하늘나라에 갔다. 버리지 못한 한길이 사망진단서. 사실은 미안해서다. 아빠로서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해서이다.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되는데 힘드니까, 하나님 빨리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던 것이 너무 미안해서이다. 필자가 담임목사로 인천 가좌제일교회를 섬긴 지 17년, 현장은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고 고난을 겪어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필자가 겪은 그 아픔을 가지고 성도들 손만 잡아도 울고, 그냥 들어만 주어도 울고, 기도만 해도 운다. 욥의 고백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그냥 한 번 하나님에게 넋두리한다. "하나님 정금이 안 돼도 좋으니 고난으로 단련하지 마세요. 너무 힘들어요." 하나님이 화내시려나?

김명서 목사/가좌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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