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

[ 목양칼럼 ]

고광진 목사
2020년 11월 06일(금) 11:10
시골에 가면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 이런 생각을 해서 시골로 내려간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무렵 나는 성경의 두 구절에서 만난 하나님,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사 45:15)"과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사 42:2)"을 보고 배우면서 살아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할 때도 건물 외부와 내부가 너무 예배당스럽지 않도록 설계했고, 간판도 작게, 목회 활동도 요란하지 않게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야 목사지만, 마을에서는 목사가 아니라 농사짓고 양계하는 이를테면 "어이, 고씨~"하는 식으로 불리는 평범한 마을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포복하듯 낮고 조용히 살았다.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비량 목회를 하도록 이끌었고, 덕분에 나는 요즘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고, 또 그 덕분에 목회만 했으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좋은 이웃들을 만나게 되었다.

언젠가는 동네 아는 형님에게 지나가는 말로 볏짚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를 물었었다. 그런데 그 형님은 그 소리를 흘려듣지 않고 기억했다가 얼마 전 논 추수를 끝내면서 나에게 찾아와 볏짚을 자르지 않고 논에 그냥 깔아뒀으니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라고 일러 주셨다. 무덤덤한 말이었는데 뭔가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사실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나에겐 이상하게 감동이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 그동안 내가 교회 현장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감동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순간 깨달았다.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마음으로 몸도 마음도 낮추며 살다가 그 형님 속에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한 것 같았다.

이런 경험들이 몇 차례 쌓이자 왜 교회 안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착하고 좋은 사람들을 교회 밖에서 오히려 자주 만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신학적 사고는 잠시 접어두고 현상을 통해서만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거기다가 신(神)까지도 동원해 보겠다고 모인 사람들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더 적극적인 사람들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보다 자기 유익에 밝고 빠른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날 기분 좋게 아는 형님 논으로 내려왔다. 포근하다. 그동안 뭔지 모르게 지쳐있던 마음이 위로받는다. 맑은 가을 햇볕도, 볏짚 냄새도, 산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도, 가을걷이가 끝나 어지럽게 흩어진 논밭 색깔도 다 좋다. 무엇보다 아는 형님의 마음씨가 참 좋다.

고광진 목사/정산푸른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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