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非)본질인가?

[ 논쟁을통해본교회사이야기 ] <19>아디아포라 논쟁

박경수 교수
2020년 10월 21일(수) 15:42
멜란히톤과 플라키우스.
논쟁은 중요한 사항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과 주장을 갖게 될 때 벌어진다. 인간의 자유의지나 공로가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인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이 어떤 관계를 갖는지와 같이 본질적인 문제에서 의견이 갈린다면 치열한 논쟁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중요성이 크지 않은 문제는 어떨까? 예를 들면 세례를 베풀 때 물에 완전히 잠기도록 해야 하는지 아니면 물을 뿌리는 것만으로 충분한지, 침수나 물 뿌림을 세 번 반복해야 하는지 한 번만으로 충분한지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심각한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교회 역사에서는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는 중립적인 문제'를 '아디아포라'라 부른다. 성경이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는 비본질적인 문제를 일컫는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용어이다.


#아디아포라 논쟁

종교개혁 역사에서 16세기 중반 이후 루터교회 내에서 멜란히톤(1497~1560)과 플라키우스(1520~1575)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아디아포라 논쟁'이라 부른다. 멜란히톤은 '독일의 교사'로 일컬어지는 탁월한 인문주의자이자 신학자로 루터의 계승자이다. 비텐베르크 광장에 있는 루터의 동상 옆에도 멜란히톤이 서있고, 비텐베르크의 성(城)교회 안 루터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혀 있는 사람도 루터의 아내가 아니라 동지 멜란히톤이다. 두 사람은 서로 태어난 곳은 달랐지만 함께 잠들어 있다. 아마도 멜란히톤이 없었다면 루터의 교회개혁은 불가능했거나 적어도 순조롭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1546년 루터가 숨을 거둔 후에 루터교회 내에서 멜란히톤이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루터가 죽자마자 로마교회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동맹을 맺고 이단을 박멸한다는 구실로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붕괴시키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결국 1547년 5월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가 황제의 군대에 점령당했고, 전쟁은 로마가톨릭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황제는 1548년 5월 15일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협정'을 통해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고, 성만찬 때 빵과 함께 포도주를 베풀기로 하는 등 프로테스탄트의 주장 일부를 수용했지만, 다른 여러 주제에서는 로마가톨릭 측 입장을 천명했다. 즉 미사를 포함한 로마가톨릭의 예전을 복원하고, 교황의 수위권과 주교의 재판권을 확립했으며, 화체설(化體說)과 칠성사(七聖事) 수용을 분명히 표명했다.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루터교회의 중심교리는 거부되거나 무시됐다.

이런 상황에서 멜란히톤은 작센의 선제후(選帝侯) 모리츠의 요청에 따라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협정'을 대체할 타협적인 문서를 작성했다. 1548년 12월 발표한 '라이프치히 잠정협정'이 그것이다. 여기서 멜란히톤은 로마가톨릭의 예식은 비본질적인 것, 즉 아디아포라이기 때문에 수락해도 큰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멜란히톤으로서는 루터교회를 어떤 모양으로든지 지켜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택한 차선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의 가르침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믿는 소위 '순수루터주의자들'은 이러한 멜란히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멜란히톤주의자들과 순수루터주의자들 사이에 아디아포라 논쟁이 벌어졌다.


#멜란히톤 vs 플라키우스

멜란히톤으로서는 루터교회에 닥칠 임박한 박해를 피하고 가장 본질적인 칭의에 관한 가르침을 지킬 수만 있다면, 비본질적인 로마교회의 일부 예식과 교리를 수용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황제의 부당한 강압에 맞서 순교하거나 추방당하는 편을 택했다. 루터의 계승자요 자신들의 스승인 멜란히톤의 비겁한 태도는 이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이들의 눈에 멜란히톤은 루터를 저버린 배신자이며 로마교회와 타협한 변절자였다. 멜란히톤을 본격 비판하고 나선 인물은 한때 비텐베르크에서 그의 학생이었던 순수루터주의자 플라키우스였다. 플라키우스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예전과 교리를 조금씩 허용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만일 낙타가 텐트에 코를 넣으면 머잖아 몸도 넣고 말 것이다'라는 속담처럼 결국 온갖 오류와 남용이 루터교회로 들어와 지금까지의 개혁을 무위로 돌리고 말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평소에는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문제일지라도 박해의 시기에는 그런 문제조차도 비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양심과 신앙을 시험하는 시금석이자 신앙의 순수성과 정직성을 보여주는 척도가 되기 때문에, '박해의 시기에는 어떤 아디아포라도 없다'고 주장했다.

멜란히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최선을 택할 수 없을 때에는 차선 혹은 차악이라도 택해 최악을 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플라키우스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작은 누룩이 결국 온 교회를 망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플라키우스는 멜란히톤의 '라이프치히 잠정협정'이 그리스도와 벨리알,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를 뒤섞어 혼합한 잡탕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결과적으로 아디아포라 논쟁으로 인해 멜란히톤은 루터교회 내의 지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아디아포라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과 복음을 세상에 적절한 방식으로 전하는 일 사이에서 늘 고민하게 된다. 실상 아디아포라 개념은 신앙의 정체성과 현실의 적합성을 조화시키고자 할 때 매우 유용한 도구이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이라는 교회사의 금언처럼, 비본질적인 것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훨씬 역동적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아디아포라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다. 낙타의 코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 머리까지인지, 앞다리까지인지, 몸통 전체인지를 두고 의견이 나뉠 수밖에 없다. 복음이 문화를 만날 때 어디까지 조율하고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씨름하고 있는 어려운 주제다.

박경수 교수 / 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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