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필요한 평범성에 대하여

[ 논설위원칼럼 ]

윤효심 목사
2020년 10월 19일(월) 14:39
3년 전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야드바쉠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야드바쉠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나치에 학살당한 유대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1953년에 설립된 이스라엘의 국립 기념관이다.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곳은 원통형의 구조물 속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Hall of Names)이었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희생자들의 비참한 죽음이 한 평범한 독일인 관료에 의해 실행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저는 지시대로 했습니다. 명령에 따라야 했습니다. 저는 무죄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스실 열차'를 만들어 유대인 600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 예루살렘 법정에 섰을 때 한 변론이다. 아이히만 재판은 국제적 관심 속에 7개월간 열렸으나, 자신의 악행을 의식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모습은 그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히만이 끝까지 믿은 것은 성공이었고, 그에게는 성공이 '좋은 사회'의 기준이었다. 그가 히틀러를 존경하고 그의 명령에 절대 복종했던 이유는, 히틀러가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에서 거의 8천만에 달하는 사람들의 총통 자리까지 도달한 성공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성공에 대한 아이히만의 집착은 자신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책임 불감증에 빠지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았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그녀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惡)의 평범성(banality)을 이야기한다. 즉, '악'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다는 의미이다. 아렌트의 시각으로 아이히만은 전체주의라는 당시 독일 사회의 주류 가치에 길들어서 판단 능력이 마비된 한 명의 충직한 관료에 불과했다. 대학살이라는 악행을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에 따라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아이히만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아렌트는 악이란 다름 아닌 타인의 입장을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히틀러의 명령이 잘못임을 끝까지 인식하지 못하였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자기 합리화를 통해 악을 허용하였다. 선과 악에 대한 판단 능력이 마비된 아이히만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악은 우리 삶의 주변에 너무도 가까이 평범하게 스며들어 있다. 성공적인 삶을 선(善)과 등치시키고, 정치적 성향을 신앙과 등치시키며, 특정 인물의 말을 진리와 등치시키는 사람들 가운데서 악은 슬며시 꽃을 피운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는 그 누구보다도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며, 동시에 선을 행할 의지도 확고해야 한다.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은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과연 건강한 판단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비기독교인들이 왜 교회를 걱정하는가? 가나안 성도들은 왜 늘어나는가? 교회에 과연 미래가 있는 것일까? 무거운 심연을 지나는 듯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한스 큉(Hans Kung)은 '교회'라는 저서를 통해 "교회에는 미래가 있다"고 답변하였다. 그 이유는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거듭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가 선사되기 때문이다. 은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교회에 매일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교회에 대한 약속과 희망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혜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은 어떤 이념이나 신념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준 삼아 스스로를 철저하게 성찰하고 행동한다. 왜냐하면 세상 속에서 유일한 선(善)이신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판단 능력을 상실한 '평범성'이 대학살의 참상을 초래했다면, 올바른 판단 능력을 구비한 '평범성'은 풍성한 생명 구원의 미래를 가져올 것이다. 일상에서 건강한 판단 능력을 갖고 소소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그리스도인,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악의 바이러스가 곳곳에 퍼져있는 현시대에 교회와 사회에 꼭 필요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윤효심 목사/여전도회전국연합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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