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쓴 편지

[ 목양칼럼 ]

이형균 목사
2020년 10월 02일(금) 09:26
나이 마흔이 되기 전에 농촌으로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한 살이라도 젊어서 가야 괭이질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담임목사님께서 목양실에 앉혀놓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으셨다. "이 목사님! 시골 목회하려면 농사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생각해 놓은 것 있어요?", "없습니다. 그냥 가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도시목회를 정리하고 농촌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 낳은 아이들 셋을 데리고 보은으로 내려와 1년 농사를 배우고, 다시 구례로 내려와 1년, 그리고 곡성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다. 3년을 매해 1월 첫 주에 이사를 했고, 용달을 빌려 이삿짐을 나르고, 지역교회의 배려로 교육관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로 살아낸 시간들이었다. 지나고 보니 은혜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나 하는 생각뿐이다.

십 수 년 전에 아버지가 청력을 잃으셨다. 징을 치시다가 징 소리에 귀가 먹게 된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했다.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병원으로, 기도원으로, 민간요법에 할 수 있는 것은 다해보고 싶었다. 신대원을 준비하는 가운데 속이 바짝바짝 타 들어 갔지만 아버지 건강이 우선인지라 몇 달을 헤매다 온 가족이 안방에 둘러앉았다. 그리고 결단을 촉구했다, "동생! 교회 나가세, 아버지! 교회 가십시다." 그렇게 해서 가족이 모두 구원을 받았다. 물론 몇 달 공부를 못했지만 그 해에 신대원도 합격하게 되었다. 그때를 기억하면 잊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아버지 친구 장로님으로부터 온 8장짜리 편지였다. 내용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구구절절 친구인 아버지에 대한 염려와 영혼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먹먹했었다.

서울에서 섬기던 교회를 떠나온 지 10년이다. 아이가 둘 늘어서 오남매가 되었다. 그 시절, 한 명의 목회자를 세우기 위해 성도님들은 설익은 설교를 들어주셨고, 부족한 인격과 덜 다듬어진 행동을 참아주셨다. 그리고 묵묵히 기다려주셨다. 섬기던 청년들은 정이 뭐라고 지난 10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거처를 찾아와 얼굴을 보고 간다. 그것도 시집, 장가가서 아이들과 함께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큰 힘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10년을 한결같이 매달 또는 격주로 편지를 보내주시는 장로님이 계신다. 청년부를 맡아 부장으로 섬기셨던 정00 장로님! 남녀간 연애편지도 이렇게까지 정성일까 싶다.

그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지난 시간을 회상하며 껄껄 웃기도 하고,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위로하심을 크게 느낀다. 기도로 쓴 편지 덕분일까! 선한이웃공동체를 찾으신 마을어르신들이 "왜 교회 안 하요?" 하고 물으신다. 웃으며 대답한다. "네 어르신 안 그래도 다음 달 공사 들어갑니다."

이형균 목사/선한이웃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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