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필요해

[ 목양칼럼 ]

정세용 목사
2020년 07월 24일(금) 00:00
국어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뜻풀이를 하고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 정답은 위로이다. 이 설명만 보더라도 마음이 먹먹해지거나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왜일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위로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언어의 온도'라는 책에서 위로에 대한 신선한 설명을 발견했다. '위로는 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이다.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있는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끝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몇 번이나 곱씹으면서 고개를 끄덕여본다.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 많겠지만 하나를 꼽아보라면 위로의 사명이 아닐까?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위로의 방법도 다양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 개인적인 상황에 집중할 수 있는 심방, 하나님께 토로할 수 있는 기도, 개인적 요청에 따른 상담 등. 늘 부족하고 연약함을 경험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위로의 천사로 살고 싶다. 위로 받으면 힘과 용기를 얻게 되고, 살고 싶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에 이런 기적과 치유의 현장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주여! 나를 위로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그런데 참으로 답답한 현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위로하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위로를 경험한 사람이 위로를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위로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거나, 위로의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고 동조할 사람이 있을까? 목회자도 성도들과 동일한 삶의 조건과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마음의 번민도 있으며, 목회 현장이나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도 상존한다. 수많은 세속적인 유혹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하여 유명한 대중가요의 가사의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필자도 힘겨운 삶과 목회의 현장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처절하게,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중이다. 친구를 비롯한 지인들과 소통하면서 간간히 위로를 받음에 감사하다. 하지만 그 위로는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 일시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있어도 계속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교제하는 '기도'의 시간이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그 어떤 문제를 가지고 나가도 하나님은 환영해 주신다. 고린도후서 1장 3절의 말씀처럼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한두 번이 아닌, 수 십, 수백 번이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고 위로해 주셨다. 확신하건대 그 위로는 수 천, 수 만 번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위로받은 위로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정세용 목사/신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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