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스티그마'에서 구원의 '사인'을!

[ 현장칼럼 ]

김희룡 목사
2020년 06월 16일(화) 00:00
2018년 여름, 대기의 온도는 40도를 웃돌았고 아스팔트의 온도는 쉽게 70도를 넘나들고 있었다. 유례없는 폭염에 모두가 지쳐가고 있던 어느 날, 콜트악기 해고노동자 방종운 지회장님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의 팔다리는 불에 구워진 가재처럼 시뻘건 화상으로 온통 물집이 잡혀 터져 흐르고 있었다. 국회 앞에서 피케팅을 하다가 팔다리가 그리 되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급히 약을 사서 발라 드렸으나 화상자국은 그 해 여름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그때 문득 부당하게 해고된 이후 13년 거리농성의 세월 속에서 그의 몸과 마음에 수도 없이 새겨졌을 상처들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상처를 보며 성서에 등장하는 상처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나는 할례이며 다른 하나는 '스티그마(Stigma)'다.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하나님께 선택된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 할례를 행했다. 같은 목적을 위해 기독교인들 역시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라는 논쟁이 초기 교회 안에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고백했다. 바울은 할례가 아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여정에서 새겨진 고난의 흔적이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고난의 흔적을 바울은 '예수의 흔적'이라고 불렀으며 이때 사용된 '흔적'이란 말의 그리스어가 '스티그마'다. 예수님의 '흔적'을 이르는 말이니 좋은 의미를 가진 말일까? '스티그마'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스티그마'란 고대 헬라 사회에서 노예나 죄수, 범죄자, 반란자와 같은 범법자나 윤리,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존재, 또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자들의 신체에 찍는 '낙인'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스티그마'는 치욕, 오명, 오점, 불명예, 흠결 등을 상징하는 단어로서, 타인들의 외면과 혐오와 배척을 야기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말이다."

할례와 '스티그마'는 모두 몸에 새겨진 상처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할례가 하나님께 선택된 특별한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자기 몸에 새기는 명예로운 상처라면, '스티그마'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된 자의 몸에 타인들이 새겨주는 치욕스러운 상처다. 그러나 바울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표지는 스스로 새기는 명예로운 상처인 할례가 아니라 타인들이 새겨주는 상처인 '스티그마'일 수 있음을 일깨웠다. 인간과 역사의 구원을 이루는 예수님의 십자가 여정은 할례와 같은 명예로운 상처가 아닌, 온갖 불명예의 '스티그마'를 감내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이라면 타인의 상처에서 실패와 혐오가 아닌 희망과 구원의 표지를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함을 일깨웠다.

콜트악기 해고노동자 방종운 지회장은 13년 거리농성의 힘겨운 세월 속에, 또한 노동운동이 백안시되는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기업의 부당한 노동자 해고를 고발하며 매일매일 자신의 몸과 마음에 치욕과 불명예, 외면과 혐오의 낙인인 '스티그마'를 새겨가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상처들이 실패한 인생의 '스티그마'가 아니라 언제라도 쉽게 처리될 수 있는 해고의 위험과 고용불안의 노동현장을 개선하는 희망의 '사인'으로 남게 되길 기도한다.

김희룡 목사/성문밖교회·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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