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판자촌 도시빈민선교한 활빈교회

[ 여전도회 ] 작은자운동 45년 : 작은자복지선교회의 교회사적 의미 5

이치만 교수
2020년 04월 21일(화) 13:50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에 의한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한국교회는 도시로 몰려드는 도시빈민들을 직면했다.

1971년 청계천 판자촌에 장로회신학교에 재학 중인 김진홍 전도사가 도시빈민선교를 시작했다. 활빈교회가 그것이다. 김진홍 전도사는 경제적 가난과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비인간적인 삶을 사는 빈민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써 건강한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복음에의 열정을, 그의 저서 '새벽을 깨우리로다'에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그 머리가 되시는 교회는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착취당하는 자의 해방의 종교로 출발했다. 오늘 깃발을 올리는 활빈교회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교회이다. 빈민과 근로자와 영세농민들에게 예수를 심는 교회이다.

둘째, 활빈교회는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를 섬기고 개발하는 교회이다.

셋째, 활빈교회는 사랑하기를 배우고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이다.

넷째, 활빈교회는 한국인의 체질과 요구에 응하는 제도와 신학을 형성하고 지역사회 복음화의 전략과 기동력을 개발하는 교회이다.

다섯째,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억압, 경제적인 불균형, 사회적 불평등, 곧 온갖 비인간화 현상에 강력하게 도전해야 하며 활빈교회는 이를 수행하는 교회이다.

이런 김진홍 전도사의 빈민선교를 눈여겨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일본 도쿄시 하치만야마교회를 시무하는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였다. 1973년 노무라 목사는 청계천 빈민들 가운데 영양실조와 병마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는 청계천의 가난과 비인간적인 삶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 때문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인으로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그리고 청계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김진홍 전도사가 눈에 띄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서로 안아주고 도와준다면 그 가운데 예수님은 계신 것이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의 사랑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로 흘러가게 돼 있다. 큰소리로 외치지 않아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듣고 보고 알게 되는 것이다.

1973년 노무라 목사는 김진홍 전도사의 부탁으로 독일의 KNH(Kindernothilfe, 킨더노트힐페)를 찾아가서 한국 청계천의 상황을 전하고 청계천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아동들을 위해 후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1974년부터 청계천의 활빈교회는 KNH의 후원을 받아 청계천 아동들을 돌보고 아동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사들의 급여를 지급할 수 있게 됐다.

1980년에 이르러 KNH의 후원을 받는 국내 시설은 10여 개나 됐다. 그 시설들은 청계천 사람들이 이주해간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을 비롯하여, 인천, 제주, 성남 등지로 넓게 퍼져 있었다. 이들 시설이 속한 교단은 예장 통합과 기장이었다. 1981년이 되어서 구세군에 속한 시설도 KNH의 지원을 받게 됐다. 각 시설이 속한 교단이 3교단으로 늘어나면서 초교파적인 기구가 필요해졌다. 1981년 초교파 기구인 'KNH 한국협의회'가 구성됐다. 1982년에는 그 명칭을 '한독아동복지선교협의회'(약칭 '한아협')로 변경했다.



이치만 교수 / 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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