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선교사들이 시작한 고아학교, 일신여학교 등

[ 여전도회 ] 작은자운동 45년 : 작은자복지선교회의 교회사적 의미 4

이치만 교수
2020년 04월 14일(화) 14:57
한국기독교 전래 초기 여성선교사들에 의한 고아학교도 시작됐다. 1891년 10월 12일 제임스 맥케이(Rev. James H. Mackay) 부부,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포셋(Miss Belle Fawcett)과 함께 진 페리(Jean Perry)가 부산으로 입국했다.

페리는 호주의 선교사 파송 단체인 장로교여선교회연합회(PWMU: 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 소속이었는데, 이 단체에 파송되는 여선교사는 선교사로 일하는 동안 미혼의 신분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페리와 선교사 일행은 1892년 3명의 고아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한 아이는 목발(two sticks)에 의지해 구걸을 하는 아이였다. 1893년부터는 페리가 주도해 본격적으로 고아학교가 시작됐다. 이 고아학교는 미우라(Myoora)로 불리다가, 1895년 부산경남지역 최초의 여학교인 일신여학교가 됐다.

페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894년 장로교여선교회연합회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고아와 맹인을 위한 독립선교사로 사역하기로 결단한다. 호주로 일단 귀국해서 독립선교사로서의 활동에 필요한 모금활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1897년 호주출신의 독립여성선교사 엘렌 패쉬(Ellen Pash)와 더불어 서울 서대문밖에 '불우아동을 위한 집(Home for Destitute Children)'을 시작했다. 이 학교에서는 한글·한문·산수·지리·상식 등을 가르치고, 벽돌과 직물을 제작하여 판매하기도 했다. 그 판매대금은 학교운영과 학생들의 자립에 충당하기도 했다.

이상으로 간략하게나마 여성선교사에 의한 고아학교에 대해서도 살펴봤다. 정리하자면 여성선교사들도 조선에 입국하고 '비존재'들을 발견했다. 조선 사람은 어느 누구도 이 불우한 아동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불우한 아동들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했다'.

그러나 호주의 여성선교사는 직관적으로 이 땅에서 '가장 작은 자'가 누구인지를 발견했고 복음이 가르치는 바를 실천으로 옮겼다. 즉 비존재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서 존재가 되게 하는 사역을 한 것이다. 1911년 진 페리가 기록한 책에는 1892년에 부산에서 처음 돌보았던 아동들이 지금은 성장해 모두 기독교학교의 교사가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작은자운동의 출발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국교회는 새로운 형태의 '비존재'를 직면하게 됐다.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에 의한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도시로 몰려드는 도시빈민들이 그들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이 본격화되면서 서울에는 의류나 가발과 같은 노동집약적인 영세업체들이 동대문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이런 업체들은 농촌에서 상경하는 저렴한 노동력을 흡수했다. 그래서 이즈음 서울의 인구는 5년 만에 100만 명이나 급증하기도 했다.

농촌에서 도시로 상경한 사람들은 기존의 주택가가 형성된 지역으로 이주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정부의 공공부지나 급경사지역, 즉 청계천·중랑천·정릉천·망원동·봉천동 등지에 판자로 된 무허가 거주공간을 짓고 집단적인 거주지를 형성했다. 이른바 판자촌이었다. '판자집'은 부엌으로 사용하는 공간이 딸린 방 하나의 거주공간이었다. 상하수도는 없었고 공용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이 있었다.

이런 판자집은 거주의 편의성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비바람을 피해서 머리를 누이고 간단히 밥을 지어먹는 정도였다.

그 가운데서도 청계천은 판자촌의 대명사였다. 1970년대 청계천에는 약 6만여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도심 한가운데 거대한 빈민촌이 형성된 셈이었다. 정부는 이 불결한 슬럼지역을 해결하고자 했다. 아주 쉬운 방법은 빈민촌을 밀어내고 청계천을 복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청계천의 빈민들은 항상 철거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판자를 보수하기라도 하면 곧바로 철거반에 의해 철거됐다. 그러면 밤사이에 다시 판자집이 세워지는 숨바꼭질이 반복됐다. 철거반원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땅을 파서 거적으로 출입문을 세우고 '개미집'을 짓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치만 교수 / 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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