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가 본 한국의 고아, "굶주려 벽지까지 삼키려"

[ 여전도회 ] 작은자운동 45년 : 작은자복지선교회의 교회사적 의미 3

이치만 교수
2020년 04월 09일(목) 07:51
기독교 전래 초기의 아동복지

한국기독교 전래 초기에 선교사들은 여성들만큼이나 '비존재'였던 실체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고아였다. 고아는 역병이나 전쟁으로 부모가 일찍 죽어 고아가 되는 예도 있었지만, 흉년이 들어 가난한 집에서는 부모에 의해 유기되는 예도 있다. 근대계몽기 이전에도 고아는 홀아비·과부·무자식의 늙은이와 함께 구휼이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은 있었다. 그러나 신분제에 기초한 조선 사회에서 아동구휼제도가 있었다고 해도 다음과 같은 것이다.

"유기아를 거두어 기르는 것은 3살로 하되, 연이은 흉년이 들었을 때는 8~9살 혹은 15살로 한다. 흉년의 전도와 수양한 기간의 장단 및 수양인과 피수양인의 정하는 바에 따라 영구노비, 일대노비 또는 기한부 노비로 한다. 수양한 지 3개월 이전에 부모나 친척이 찾아가려 할 때는 소비된 곡식의 두 배를 갚은 후에 돌려줄 수 있고, 3개월 이상이 지나면 허락하지 않는다. 공노비와 사노비가 결혼하여 유기아를 수양했을 때 유기아가 장성한 후 공노비로 돌릴 것인지 사노비로 돌릴 것인지 주인들이 쟁송하여 양쪽이 모두 부당하면 장성한 유기아는 양민으로 돌린다."

정리하면 혈육에 의해 '가족' 안으로 흡수되는 경우가 아니면 노비나 머슴으로 편입되는 것이 아동구휼제도였던 셈이다. 그런데 청일전쟁(1894) 발발 이후는 이마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한 난민의 대량 발생 그리고 때마침 발생한 역병 등으로 가족해체가 급속히 일어났다. 이로 인해 고아가 다수 발생해 민가에서 고아들을 수용하지 못하면서 거리에 유리하는 행걸아들이 넘쳐났다.

바로 이즈음에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서울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딘 개신교 선교사는 알렌(H. N. Allen)이었다. 그러나 안수받은 개신교 선교사로서 최초로 서울에 입성한 사람은 언더우드(H. G. Underwood)였다. 언더우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국어를 배우는 것과 동시에 부모 없는 어린아이 몇 명을 모아서 그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동의 자택을 어린아이들이 기숙하고 학습할 수 있는 시설로 개조했다. 정부의 허가를 받아 1886년 초에 고아학교인 '학당'을 열었다. 이 학당은 처음에 언더우드학당, 이후 예수교학당(1891), 민노아학당(1893)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경신학교(1905)로 바뀌었으며 오늘의 경신중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의 전신이 됐다.

이 고아학교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수용됐던 아동 가운데 한 아이가 김규식이었다. 김규식의 아버지 김지성은 동래부(현재의 부산 동래)의 관리로 재직했다. 1885년경 외국과의 불평등한 무역관계의 시정을 요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것이 문제가 돼 귀양길에 오르고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모친까지 사망했다. 김규식은 불과 6살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1년 남짓 숙부 밑에서 지내다가 언더우드의 고아학교에 1887년에 들어갔다. 김규식이 고아학교에 들어간 경위를 훗날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언더우드(L. H. Underwood)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의 삼촌들은 생활이 궁핍하여 이 아이를 돌보려 하지 않았으므로 새로 건립된 고아원으로 그를 데려왔다. 그러나 네 살배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그 아이는 다시 친척들에게 돌려보내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가 몹시 아픈 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기 몸 역시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가마를 타고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 아이는 너무 굶주려서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내어 삼키려고까지 하였다. 그 아이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을 언더우드 자신이 지게 될 것이라는 의사들이나 선교사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언더우드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가 극진히 간호했다."(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이만열 옮김, 언더우드)

어린이 김규식은 졸지에 고아가 됐다. 혈육이 있긴 있었으나 규식을 부양할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영양결핍은 병으로 이어졌다. 누구도 이 어린 생명을 도울 수 없었다. 김규식은 비존재 즉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린 규식을 돕는 손길이 있었다. 병들고 허기진 규식은 언더우드로부터 극진한 보호와 가르침을 받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규식은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했다. 1919년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로 파견됐다. 김규식은 파리로 떠나면서 국내의 독립선언운동이 있어야 자신이 민족대표로서의 명분이 확립된다고 국내의 독립선언을 요청했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파되면서 국내의 독립선언 즉 삼일운동이 발발하게 됐다. 다시 말하자면 비존재였던 김규식이 복음의 실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나서 역사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존재'가 됐다.

이치만 교수 / 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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